예수님의 기도와 기도의 단계
마 26:36~46
2022.08.28.
말씀에 대해 오해와 혼란이 있듯이, 기도에도 오해와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기독교만의 것이 아닌, 인간의 오랜 수단이고, 종교마다 다르게 말하고, 또 우리 민족 정서에는 기도에 대한 고유의 정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새롭게 배우는 것처럼 기도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을 통해 새로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도를 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기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미신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무당처럼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인격적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인격과 인격 사이에는 언어와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어와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고 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통하는 기독교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길게 기도한다든지 무슨 주문을 사용한다든지 어떤 의식에 치우친다든지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닙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하루종일 제단을 돌며 자기 몸을 학대하며 그들의 신을 불렀습니다. 불교에서는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염불을 하며 기도합니다. 이슬람은 정해진 기도문으로 하루에 몇 번씩 메카를 향해 엎드려 절하며 기도합니다. 일본 신사에 가면 줄을 당겨 종을 치고 허리 숙여 절하고 손뼉을 치고 기도합니다. 무속 신앙은 무당이 많은 제물 앞에서 요란한 굿을 하고 접신을 하고 빌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들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분명한 언어로 기도합니다. 때론 묵상기도도 하고, 때론 성령 안에서 신비적인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인격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기도를 알기 위해 성경의 많은 기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들... 그들은 무엇을 기도했고 어떻게 기도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사도들의 기도와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많은 기도 중에서, 단연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특별한 기도 하나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이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그렇게 기도하셨나 보다 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 기도가 어떤 수준의 기도이고 어떤 의미의 기도인지 알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지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반적으로 기도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도가 있고 좀 더 특별한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일반적인 기도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깊은 기도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첫 번째 기도는 구하는 기도인데,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기도입니다.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늘 필요가 있고 문제를 만납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생의 광야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나의 소원과 바램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의 생애를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어려운 시대,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았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야베스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도 이런 기도입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짐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많이 드렸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만나고... 그런데 그때가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언약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여러분, 다 그렇게 정식으로 언약을 맺으셨죠?
네, 그렇게 정식으로 언약을 맺으면,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언약 관계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의무가 있지만 하나님도 의무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의무와 약속을 잘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나의 힘과 능력을 넘어설 때,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과 딸로서, 그분의 백성으로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강청기도 안 하셔도 됩니다. 한 때 강청기도라는 기도를 많이 말했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내가 이번 추석에 선물을 사달라고 아버지께 말했고 아버지가 알았다고 말씀하셨다면, 매일 출근하는 아버지를 붙들고 강청하면서 ‘이번 추석에 선물 사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계속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적절하고 충분히 기도했다고 생각되면, 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의 기도가 그런 기도이죠. 단 한 번의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 하나 생각납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는데, 단 한 번 기도하고 또 그 한 번의 기도도 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 이번에 신학교 입학하는데...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고 몇 마디 더 했는데, 더 기도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응답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강청기도하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본래 왕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하고 말을 정확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기도드렸다는 마음과 감동이 오면,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강청기도와 비슷한 기도로 한때 자주 오르내렸던 또 다른 기도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런 능력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한때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흔들고 좌지우지 하고... 최근에 그런 외람된 발언을 한 목사도 있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런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되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 누가 그런 기도를 드린 예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했나요? 모세가 했나요? 엘리야가 했나요? 아니면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셨나요? 오히려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드린 분들입니다.
여러분, 신을 움직이고 좌지우지한다는 개념은 우상숭배적인 개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항상 그런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고 그 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아뢰고 우리의 어려움과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 비성경적인 기도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입니다.
아이들은 뭔가 부족하고 필요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지만, 그러나 꼭 그럴 때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님과 대화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은혜 아래 살아가기에, 구하는 기도를 넘어서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지치고 힘들고 쓸쓸할 때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구하는 기도를 넘어서 교제하는 기도를 할 때, 매우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이 늘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라.”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것은 사람을 기도의 의무나 굴레에 매이게 하는 그런 불편한 의미가 아니죠. 하나님과 늘 소통하고 대화하고 교제하는 생활을 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좋은 친구와 만나 즐겁게 대화하듯이, 우리가 가족과 즐겁게 매일 일상을 나누듯이,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기도의 자연스러움과 기쁨과 자유를 주시길 빕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찾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거나 명확한 응답을 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응답하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는 일은 성경 안에서도 매우 예외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찾는 이 세 번째 기도는 무슨 기도인가...? 이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와 땅의 소리를 그만 듣고, 하늘의 소리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든지, 아니면 새벽이나 밤늦게 조용히 기도한다든지, 특별한 장소에 간다든지... 그런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번에 제가 방송을 보니까, 이스라엘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님이 시내산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 새벽에 일찍 올라가는데, 그분은 미리 오후에 올라가서 거기서 자고, 이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일출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하는 기도’를 넘어서 ‘교제하는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우리가 드리게 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더 밝아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단계가 됩니다. 이런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강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지난주에 잠깐 말씀드린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여러분, 이 네 번째 기도부터는 기도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로만 나아가는 기도가 아니라, 이제 우리 자신을 향해서 돌아오는 기도가 됩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신이 마음과 영의 뜻을 잘 따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게으르고 욕심이 나고 하기 싫고 그래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못하는 상태입니다.
겸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용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죠.
한국교회는 아직 이런 기도까지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런 기도를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 능력 받고 축복 받고 문이 열리는 그런 기도를 좋아하지, 이런 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기도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실천하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내면과 자아를 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대개 강합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항상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올바른 방향을 잡고 기도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 없이 기도만 하면 무당이 됩니다. 말씀 없이 기도만 하면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이 됩니다. 말씀 없이 기도만 하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 교회 안에는 그런 사례가 더러 있었습니다. 말씀은 잘 모르는 분이 기도를 많이 하셔서 영적인 힘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방언을 체험한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이 바울을 무시한 것 같이 그런 분들이 교회 안에서 목사님의 권위까지 무시하고 다른 교인들에게 무분별하게 기도해주고 상담해주고 예언해주고... 그래서 교회를 어렵게 하는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좋은 사례는 아니지만, 아무튼 이렇게 분명한 것은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올바른 방향을 잡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연약한 육신을 기도로 강화하시길 권면드립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기도는 우리의 뜻을 꺾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도입니다.
네 번째 기도부터 기도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이 다섯 번째 기도는 확실히 기도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향해 나아가 우리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뜻을 꺾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많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알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 예수님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이 주님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절정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배우고 하게 되면서, 마지막 단계가 있다면 바로 이 기도입니다. 무슨 방언기도나 예언기도나 이런 기도가 기도의 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 뜻에 맞추는 기도가 최고의 기도입니다.
방언기도나 예언기도나 능력기도나... 다 좋은 기도들이죠. 그러나 가장 훌륭한 기도는 바로 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의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기도의 최고의 자리에 가까이 간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첫 번째 기도부터 잘 시작해야 합니다. 구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교제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로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연약한 육신을 강하게 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신앙이 쌓이고 쌓인다면, 우리는 어느 날 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결정적인 장소이죠. 십자가의 승리는 이 겟세마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런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돈이 걸려 있고 우리의 앞길이 걸려 있고 우리의 자리가 걸려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이런 단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마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예수님의 기도를 여러분의 신앙 목표로 두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매일 그 높은 자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신을 벗고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죠. 욕심과 이기심을 여전히 가진 채, 알량한 교만을 여전히 가진 채, 어리석음과 누추함을 여전히 가진 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것을 버리고 우리의 잘못된 뜻을 꺾어야 하나님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최고의 기도의 자리로 늘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