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가룟 유다의 배반

믿음찬교회 0 713 2022.07.29 10:41
가룟 유다의 배반
마 26:14~25
2022.07.24.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배반자의 대명사이죠. 4복음서는 모두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가 모두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4복음서 모두 그의 배반의 이유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의 오랜 궁금증이 되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에 대해 간혹 유다 편에 서서 유다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필요악 역할을 하였고, 성경의 예언을 이루었고, 그래서 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러시아의 어떤 작가는 유다가 예수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 배신자의 짐을 짊어졌다는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생각이나 주장은 자유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사사기 시대처럼 각자 자기 소견에 옮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론 성경이 어떤 문제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각과 주장의 자유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사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시험하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런 문제에서 자기 생각이 펼쳐지고 그래서 자기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문제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한 사람은 더 멀어지고, 한 사람은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겐 신·불신의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양으로 염소는 염소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성경말씀이나 어려운 내 삶이나... 내 생각부터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의 이유를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기보다는 복음서 안에서 최대한 찾아보고,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배신이 선생을 배반한 단순한 배신인지, 아니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 배신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12제자를 부르셨을 때, 그때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 그룹 안에서 돈궤를 맡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나 돈과 재정을 맡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성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유월절 기간, 그러니까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와 살에 대한 설교를 하시고 유대 대중들이 떠난 후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래서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 남은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그래서 이와 같은 요한복음을 참고하면, 유다의 배신은 오래된 배신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즉흥적으로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뭔가 예수님과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계속 유다 안에 있었고 결국 지금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배신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 배신의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다가 배신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이유이죠.
둘째는 유다의 배신을 가능케 한 배경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유다의 배신을 촉발시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그때 배신의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트리거가 되는 이유이죠.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1년 전 유월절에 말씀하신 것으로 보면, 그때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다로하여금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만든 것일까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2년간의 갈릴리 사역을 막 끝내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그 2년간의 갈릴리 사역 속에 뭔가 예수님과 어긋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한마디로 이런 것이었죠.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유다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에서 병자들을 고친 것이나 초자연적으로 귀신을 축출하신 것이나... 그런 것 때문에 돌아설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근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과 성전을 뛰어넘는 새로운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말씀이지만 반체제적이고 위험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물리적인 혁명이 아닌 영적인 혁명으로 이루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중을 선동하는 것도 없으셨고, 대중을 조직하는 것도 없으셨고, 예루살렘이나 산헤드린으로 진출하는 것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열두 제자를 비롯한 소수의 제자들이 전부였고, 여기저기 갈릴리를 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냥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유대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새로운 역사를 마음에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 사상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분인 줄 알고 제자가 된 것이죠.
그러나 갈릴리 2년 동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가 생각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도 이해가 안 되고 그 나라를 이루는 방법도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가룟 유다가 강한 자기 생각 속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그의 배신의 근본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고, 내가 생각한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따르던 선생님을 다 배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분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배반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계속 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엔 대체로 2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돈 때문입니다. 유다는 제자 그룹의 돈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는 거기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렇게 유다는 돈에 대한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유다의 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그의 배신의 배경적 이유가 됩니다. 돈은 죄의 온상입니다. 돈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부끄러움도 마다하지 않고 사기도 치고 살인도 하고, 돈 때문에 권력도 추구하고 배신도 하고... 모든 죄와 악의 배후에는 돈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고 은 30을 받았죠. 물론 유다가 은 30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유다의 배후에는 항상 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돈은 유다 배반의 한 중요한 배경적 이유가 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죄를 피하고 그 안에 얽히지 않기 위해, 돈에 있어 깨끗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예수님 곁에 머문 두 번째 이유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유다의 배반에 있어 사단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기 복음서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으로 가면 이 복음서들은 유다의 배반의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은 1년 전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마귀라고 언급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사단이 유다에게 이 유월절 기간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리고 이어진 유월절 만찬에서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떡 한 조각을 받게 되고, 그때 사단은 유다에게 완전히 들어갑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누가복음도 이때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단의 역사가 유다 배반의 배경적 이유가 됩니다. 사단은 유다에게 계속 역사하여 그의 생각을 예수님과 어긋나게 했고, 돈에 대한 마음을 자극하고 부추켰고,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물게 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다에게로 들어가 유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네, 이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작은 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서서히 지배하고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사로잡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귀신들림 현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지 못하고 저항하지 않고 뒤로 물러날 때, 악한 영은 들어오고 마침내 완전히 그 사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그런 역사의 원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에게 역사한 이와 같은 사단의 역사를 영적인 눈으로 밝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다 배반의 직접적인 방아쇠를 당긴 이유와 사건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갈등, 돈에 대한 강한 마음, 가스라이팅 같은 사단의 오랜 역사... 그런데 이 모든 화약에 불을 붙일 직접적인 사건은 무엇일까요?
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추정을 하는 일입니다. 신학적인 것도 아니고 딱히 성경적인 해석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그날 마지막 만찬에서 떡 한 조각을 주시죠.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죠. 그것이 유다로 하여금 배신의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실 유다는 이미 그 전에 대제사장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하고 은 30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배반의 직접적인 이유와 사건은 이미 그전에 발생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그 결정적인 사건을 마리아의 향유 사건으로 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그 향유 사건 때 몇몇 제자들이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마리아를 책망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화를 내고 분개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비난한 사람 중에서도 유독 가룟 유다를 꼭 집어서 말합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한복음 이렇게 제자들 중에서도 유다가 그렇게 강하게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과 가룟 유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네, 아마도 이 예수님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질책이 가룟 유다를 당황하게 하고 부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이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섭섭함과 모욕감을 느끼고 배반을 결정했다고 봅니다. 이 사건 후 가룟 유다는 바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갑니다.
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할 마음을 이미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말씀이 결정타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섭섭함과 모욕감을 더 느꼈을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막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죠.
베드로 역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그 부인은 일시적이고 상황적인 부인이었기 때문에 배반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가룟 유다 배반의 이유를 여러 각도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상의 유다 배반의 이유 가운데 어떤 이유가 교훈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 생각, 돈과 물질에 대한 강한 마음, 가스라이팅 같은 사단의 오랜 역사, 예수님에게서 받은 섭섭함과 모욕감 ... 이 이유들은 다 우리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중에서도 유다 배반의 근본적인 이유인, 그가 자기 생각 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가룟 유다는 거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가룟 유다 같은 인물이 몇 명 더 있습니다. 구약에는 사울 왕이 있고, 신약에는 바울의 제자 데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 새 마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고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에서 예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 왕이 왜 하나님에게 버림 받았을까요?
사울이 아말렉을 칠 때 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을 따라 좋은 양과 소들을 남기고 아말렉 왕 아각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제자였던 데마도 그랬습니다. 그는 처음에 신실한 사람이었고 바울의 귀한 제자였고 동역자였습니다. 데마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바울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데마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마지막 시간 속에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쓸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랐던 가룟 유다도,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도, 바울과 함께 사역한 데마도... 처음엔 다 신실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고 왕으로 일하고 바울과 함께 사역을 하였지만, 도중에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온전히 감화되지 못하고, 결국은 자기 생각 그대로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 말씀도 내가 믿는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도 내가 바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 나를 거치고 나 중심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엄밀히 말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 생각도 바꾸고 내 뜻도 바꾸고 내 가치관도 바꾸고... 그래야 우리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 자기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고치고 그렇게 계속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아니라 그런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가룟 유다가 되고 사울 왕이 되고 데마가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단순한 일반적인 배반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로 발생한  영적인 배반입니다. 그래서 4복음서는 모두 그의 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늘 감화되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장하고 익어가고 있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실수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아무쪼록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뜻 가운데 변화되고 자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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