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를 부은 여인
마 26:6~13
2022.07.17.
4복음서는 모두 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중 누가복음은 그 사건의 시간과 장소가 다른 복음서와 많이 달라서 다른 사건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동일한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향유 사건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 안에서도 조금 차이는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일치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사건이 유월절을 이틀 남긴 시점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한 집에서 잔치할 때 일어났고, 기름을 머리가 아닌 발에 부었다고 하고, 또 그 여인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특히 이 사건의 시점이 마태 마가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불일치에 대해 신학자들은 대체로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쓰면서 마태와 마가의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마태와 마가가 더 사실적인지, 요한이 더 사실적인지 판가름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건이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편, 이런 사실에 있어서의 불일치에 대해 우리는 당시 성경 저자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와 당시 사람들은 시계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사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처럼 사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되 단순한 사실보다는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미를 위해 기본 사실을 조금 수정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기본적인 관념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 간에는 이런 불일치가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시대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이 사건을 유월절 이틀 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는 그런 마가복음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가 이 사건을 예수님의 죽음 이틀 전으로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두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그 어두운 시간에 이 아름다운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도 그렇지만 여기 마태복음에서도 이 향유 사건 앞뒤로 배치된 사건이 매우 어둡고 추악합니다.
A. 유월절이 가까운 시간 (1~2절)
B. 예수를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3~5절)
C. 향유를 부은 여인 (6~13절)
B′.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가룟 유다 (14~16절)
A′. 무교절의 첫날, 양 잡는 날 (17절)
그래서 이 구조를 보면, 이 향유 사건은 유월절이라는 배경이 앞뒤로 감싸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 향유 사건을 감싸고 있죠.
또 이 여인은 예수를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를 배반하는 가룟 유다가 앞뒤로 감싸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만,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유월절이라는 배경과 예수를 죽이려는 악인들에 둘러싸여 한 줄기 빛처럼 보석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이 향유 사건의 의미는 한 마디로 고귀한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향유를 부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이것은 그 여인의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찬사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흘러내리는 값비싼 향유를 계산하고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향유가 아닌 그 여인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에 담긴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가 행한 일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처럼 우리도 그 여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에 어떤 아름답고 고귀한 의미가 있는지 우리도 이해하고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향유 한 병을 들고서 말이죠. 요한복음은 그 향유를 나드 향유라고 말합니다. 나드 향유는 인도 히말라야 고지대에 자생하는 한 식물(나도스타키 자타만시)의 뿌리와 줄기로 만든 매우 값비싼 기름입니다. 주로 왕의 보좌나 식탁에 쓰이고 혹은 부유한 이들의 혼례용품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그것을 보관할 때는 옥합에 담고 단단히 밀봉해서 보관하는데, 바로 이것을 그 여인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식사하시는 예수님에게 가서 그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나드 향유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진동하는 나드 향기 속에서 그 여인을 온전히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깊은 마음을 보셨습니다.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첫째, 그것은 ‘감사’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이 여인의 이름을 압니다. 그녀는 마리아이고,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었죠. 죽은 지 삼일이나 되고 냄새가 났었는데, 그런 나사로를 예수님은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놀라고 감사했을까요? 그냥 감사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어떤 감사의 보답을 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리아는 그것이 자신이 소유한 향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를 책망하는 사람들을 막으시면서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 에스켄 에포이에센” 직역하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는 말입니다.
조금 의역을 하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 그는 힘을 다하여 이것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드림으로 자신의 최선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행한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기억되는 아름다운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향유의 첫 번째 의미는 감사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향유를 생각할 때 그것은 그녀의 최고의 감사였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리아를 보면서, 나도 하나님께 우리 주님께 또 나의 고마운 은인에게 그런 감사를 드리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모르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호의를 입고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작은 은혜도 있고 큰 은혜도 있죠. 그런데 은혜는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갚아야 하는 사랑의 빚입니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잊어버리겠지만, 그러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것을 꼭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다음의 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우리에게 임하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것을 알고 그것을 느끼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고백과 기도로,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사용하는 우리의 재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실천하면, 우리도 주님께 향유를 드리는 사람이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향유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고마운 사람에게도 향유를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그것은‘믿음과 헌신’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드릴 때, 마리아는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말하죠. 아마도 그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 없죠. 그런데 마가와 마태는 아직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까요? 일반적으로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는 것은 연회를 베풀 때 귀빈을 대접하는 한 풍습입니다. 마리아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런 의미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 같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사실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과 말씀을 보고 듣고 따른 사람이라면, 그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맹인 바디매오도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그 사실을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님은 이 적대적인 예루살렘과 유월절 속에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계속 예고했고 마리아는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메시아이신 그분을 메시아로 높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분과 그분의 길을 이렇게 높여 드리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과연 그 정도로 깊이 생각했을까? 마리아의 신앙이 그 정도로 깊었을까?
그러나 현대의 우리 가운데 마리아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오빠 나사로를 살리는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고, 향유를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마리아보다 우리 신앙이 더 나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리아의 마음과 신앙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나드 향유는 감사의 의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 믿는 마리아의 믿음과 헌신이었습니다. 이 적대적인 예루살렘과 유월절의 시간 속에 자신은 이 향유를 그분께 부어드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리아의 마음이 예수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깊은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이었던 초대교회의 신앙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흐르면서, 한낱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나를 위해 존재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종교입니다. 위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능력을 받고... 다 나를 위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은 이런 종교가 다 된 것이 아닌가... 원하고 빌고 받고... 그런 삼류 종교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기독교의 처음 신앙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분을 다함 없이 사랑하는 것이고, 내 모든 것 드리는 것이고, 그분 발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그런 원형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이런 원형적인 신앙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방언하고 능력 받고 복 받고 형통하고... 그런 것은 신앙의 원형이 아닙니다.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예수만 보이는 절대적인 신앙의 세계에서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절정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분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런 신앙의 원형과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행한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어디에서나 기억될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것은 ‘예수님의 장례’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의 향유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장례 절차 중에 하나는 시신을 깨끗이 씻고 기름을 바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런 절차 없이 함부로 매장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죽음도 슬프지만, 시신을 그렇게 고이 거두지 못하면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슬픔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이 향유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예수님의 그런 십자가 죽음을 온전히 예견하고 향유를 부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향유를 받으시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의 향유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 귀한 향유가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죽음을 위한 고귀한 기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행한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어디에서나 기억될 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향유를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귀한 것을 그분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이 바벨론의 우상의 제국에서 나는 우상의 제물로 나를 더럽히지 않겠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의 결단을 받으셔서 그것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다니엘의 위대한 생애는 그 결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어둡지만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소금과 빛으로 살겠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런 결단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이 불신과 미신의 혼탁한 세상에서 나는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겠다...’ 여러분은 이 거짓된 종말의 시대 속에 깨어있는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능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드려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드리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드리는 일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부터 드리시기 바랍니다. 헌금도 그런 마음으로 하시고, 하나님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도 그런 마음으로 하시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자신의 뜻과 목적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사랑과 믿음과 헌신이었고 신앙의 원형이자 절정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의 죽음을 고귀한 죽음으로 만드는 귀한 기름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마리아가 행한 일을 복음이 전해지는 어디에서나 기억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귀한 당부를 따라, 여러분들은 이 마리아의 행한 일을 기억하시고 그 귀한 향유를 아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마리아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