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 양과 염소
마 25:31~46
2022.07.03.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 마지막 부분입니다.
잠시 지금까지 내용을 돌아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성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종말과 관련해서는 많은 징조와 주의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서는 징조를 말씀하시지 않고 그날은 도적같이 갑자기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를 잘 들었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불안한 마음으로 어떤 징조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충성된 종이 되고 기름을 준비하고 달란트를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은 아무도 모르고, 종말은 깊고, 결정적 징조는 없고, 내일이라도 예수님은 재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종말론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구약 배경은 바로 다니엘서 7장입니다. 다니엘서 7장은 다니엘서의 중심인데, 거기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놀라운 환상이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성경의 환상 중에 가장 중요한 환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도 이 환상을 많이 의지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신 예수님은 마지막 그날에 심판주로서 심판하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이 내용을 다니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6~27)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곧 예수님의 심판이 됩니다. 그날에 세상의 역사는 종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됩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그렇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과 사람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심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네, 마지막 심판에서는 이렇게 거대한 분리가 일어납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여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이분법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이 있고 더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고 더 좋은 것이 있고... 수학적으로 0과 1사이엔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 거기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모든 사람을 그렇게 구분하실 것입니다. 의인은 영생에, 그렇지 못한 자는 영벌에...
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고 예수님의 심판이고 신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심판의 장면을 이렇게 간단히 말씀하시고 그만두십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것이 역사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 제자들에게 더 길게 말씀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듯이... 그렇게 거대한 분리가 일어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양과 염소의 분리 다음으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내용을 매우 길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양과 염소는 사라지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양과 염소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죠.
그래서 이 내용을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가 아닙니다. 양과 염소라는 이미지만 가져왔지, 비유라고 할 만한 별다른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과 염소는 심판의 거대한 분리를 설명하는 용도로 나온 후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왼편에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면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왼편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죠. 물론 그 믿음에는 행함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기준은 그런 익숙한 것이 아니라, 여기 내 옆에 있는 작은 자,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영접해주고, 돌보아주고... 그래서 ‘이런 일과 행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준으로 지금 오른편과 왼편을 구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어렵다면 참 어려운 말씀이 됩니다. 이 구원의 기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래서 학자마다 주석마다 설교자마다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이 천차만별입니다. 또 이런 애매한 말씀에 이단들도 참견해서 이러니 저러니 자기들 유리한 대로 말합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이 쭉 이어지다가, 갑자기 묘한 선율과 화음이 나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장조가 단조로 바뀌거나, 샵이나 플랫이 붙으면서... 아주 묘한 음악이 되는 것이죠.
저는 요번에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 영상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어떤 유튜버가 그 연주 영상 아래에 피아노 악보를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하나 음과 박자와 높이와 강약을 정확하게 연주하면서 감동까지 줄 수 있는지... 음악을 잘 모르는 저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 연주 영상을 올리면서 영상 인트로 부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의 언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쩌면 음악이 아닐까... 그 섬세함, 그 정확성, 그 조화로운 아름다움... 네, 그분의 말씀에 참 깊이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오늘 본문을 만약 어떤 탁월한 음악가가 본다면, 그렇게 느끼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름답게 흘러가다가, 이 부분에서 아주 묘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다른 말씀과 비교할 때 불협화음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상하다, 잘못되었다...’ 느끼거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얕은 소견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뜻이 있어서, 또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가 어떤 뜻이 있어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의 뜻과 마태의 선한 의도를 헤아리면서 이 말씀을 최선으로 이해하면, 이 말씀의 의미를 크게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구원의 기준을 믿음의 행함과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것은 그 대상이 믿는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작은 자를 돌아보며 사랑의 실천과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기준을 충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실천의 대상보다는 실천의 행위에 주목합니다. 꼭 믿는 형제 중 작은 자에게 이렇게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이든 밖이든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할 때 우리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되고, 우리는 그래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태는 계속 행함과 열매를 강조해왔고, 마태의 그런 강조는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관되게 실천을 강조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바울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입니다. 바울로 예수님을 가리거나 바울로 예수님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러면, 천국에서 바울이 가장 슬퍼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과 죄사함과 예정과 선택은 결코 우리의 행함과 실천을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내세워 행함과 실천을 부정적으로 말하고, 우리의 구원은 그저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잘못입니다.
작은 자에게 행하는 이런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행동...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일반적인 구원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격려의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앞에서와 같이 그저 일반적으로 무난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실천의 대상이 너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이것은 분명 믿는 형제들 중 가난하고 지위가 낮고 어려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형제에게 먹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영접해주고 옷을 마련해주고 찾아가주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오른편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은 설령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그런 사람을 찾아 실천을 하기란 어려운데... 그러면 일반 사람들이 그런 실천을 안 했다고 왼편에 서게 된다....?? 네, 뭔가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적인 구원론이나 일반적인 구원의 기준을 말씀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당연히 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몰라도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선행만 하면 오른편에 설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 해석과 그런 구원론이 가능하려면, 이 말씀이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성경에도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이 독특한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있고, 또 마태복음 안에서도 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이 일반적인 구원론과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면,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의 뜻이 뭘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걸까요?
그런데 우리는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마태가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미 앞에서 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 파송 설교이죠. 그런데 살펴보면, 제자 파송을 하시면서 하신 10장의 많은 말씀이 24장과 25장에 똑같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10: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이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 24: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10: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24: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24:9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22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너무 많은 말씀이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교해 보면 24~25장의 예수님의 종말 설교는 어쩐지 제2의 파송 설교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0장 40~42절에 바로 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네, 이 10장 말씀은 우리가 고민하는 오늘 본문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러면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해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복음을 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제자들을 격려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너희들을 영접해주고 대접해주는 사람들은 곧 나를 영접해주고 대접해준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사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힘이 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종말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누군가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그렇게 돕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선행을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믿는 자들은 정말 어렵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공연히 공격을 받고 모함을 받고 눈물 흘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못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열해도 우리는 비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만났던 한 목사님은 저와 같이 전도사 시절을 보낸 분인데, 지금은 초읍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어머니가 어떤 분과 함께 사업을 했는데, 결국 그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사기를 당하고 빚만 지고 그리고 그 일로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신체 건강한 그 목사님은 아들로서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기 위해 용서했다고 합니다. 매일 밤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그 시간을 견디고, 어머니의 그 억울한 빚 7,000만원을 본인과 부인이 지난 수년간 일을 해서 어떻게 어떻게 갚아 나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형편도 나아지고 교회도 새롭게 개척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네, 그 목사님처럼 믿는 자들은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어렵죠.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오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 도와주시고, 그 누군가는 하나님이 반드시 상을 주시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
이렇게 오늘 말씀은 종말을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를 격려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번째 의미가 더 맞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비록 어려워도 믿음으로 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또 우리를 돕는 자를 복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이고,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런 특권과 자격을 마음에 품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