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첫번째 종말 비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믿음찬교회 0 281 2022.06.02 15:25
첫 번째 종말 비유(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마 24:45~51
2022.05.29.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했습니다. ‘징조는 없다, 그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임한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앞서 성전의 종말에선 몇 가지 징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은 그날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엔 왜 징조가 없을까요? 왜 그날을 알 수 없을까요?
각종 재난이나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경제위기도 그 징조가 아닙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것도 그 징조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전 종말의 시간 동안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일로 그날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 밖에 예루살렘의 회복이나 유대인의 대규모 회개도 그 징조가 아닙니다. 666표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나 7년 대환난도 그 징조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잘못된 해석이거나 오해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이런 잘못된 종말의 시간표로 그날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666표가 나오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7년 대환난이 오면 그때는 내가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 잘 해야지...’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666표는 상징적인 것이고 적그리스도는 1세기에도 존재했고 7년 대환난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징조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감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나 결정적 징조는 없지만, 우리는 이미 종말의 징조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이 오셔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징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원리와 방법입니다. 어떤 마음로 어떻게 이 시간을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첫 번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보통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잘 압니다. 내용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간단한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비유의 주인공은 한 종입니다. 이 종은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의 모든 일을 맡고 있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없는 동안 그 집과 다른 종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일입니다.
이 사람은 그런 자기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주인을 기다리면서 자기 일을 잘하면 나중에 주인의 칭찬을 받습니다.
네,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잘 감당하는 것... 그러니까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면 주인이 언제 오시는지 수시로 창밖을 보거나 대문 밖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또는 밭에서 열심히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이죠.
그것이 그 종의 준비된 깨어있는 모습이고, 이 비유는 바로 그것을 말씀합니다.

이 비유를 적용하면,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고, 종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일까요?
크게 보면,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삶을 맡기셨고 ‘살아라’ 명령하셨습니다. 생명은 ‘살아라’는 절대자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또 다르게 보면,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재능을 주셨고 ‘일해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일하고,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맡기셨고, 그것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 시대 속에서 역할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맡기신 일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직업인으로서,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한 신앙인으로서, 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역사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삶을 받고 재능을 받고 사명을 받고 시간을 받고 상황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저는 집에서는 남편이자 아빠이고, 교회에 오면 목사이고, 누구에게는 친구이고 선배이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눈이 좀 나쁘고, 역사적으로는 21세기 한국에서 사는 한 인간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능력과 일과 신앙과 상황과 조건 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받은 것도 있고 여러분이 선택한 것도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둡고 부조리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사랑이 되고 의로움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일을 하며 신실하게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가르치시는 종말론은 우리의 삶과 신앙과 일상의 중요성입니다. 종말의 시간 동안 다른 특별한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삶에 충실하고 신앙에 충실하고 현재에 충실하고 일상에 충실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삶과 신앙과 일상을 충실히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종말론은 삶과 일상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참된 종말론은 우리의 신앙을 이용하지도 않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잘못된 종말론은 우리의 삶과 일상을 희생시키고, 우리의 신앙을 이용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천지 같은 이단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천지는 대표적인 종말론 이단입니다. 신천지의 종말론은 그 신자들의 삶과 일상을 무너뜨립니다.
모든 초점을 종말에 맞추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목숨 걸고 전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헌금하고 매일 모이고 전략을 짜고 보고하고... 신천지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일반 교회에서도 종말론을 은연중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을 구분하면서... 이제 주님이 곧 오시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는데, 하나님의 일이 중요하지, 세상 일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세상에서 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앙생활을 그 사람의 최우선이 되게 합니다. 나쁜 의미에서 말이죠.
네,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을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부터 잘못되었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단지 먹고 살고 돈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말론을 그렇게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종말론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일만 중요하다, 금방 죽는 삶 금방 사라질 세상... 다른 것은 의미가 없다, 복음과 전도만 중요하다, 헌신과 희생이 최고의 가치다... 이런 종말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며 이 마지막 때를 정상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성경적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또한 제가 체험적으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인데 20대 때 신앙의 혼란이라 할까 신앙의 과도기라 할까 그런 시간이 잠시 있었습니다. 그때 힘들던 제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신앙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뭐가 힘들었냐 하면 직장생활이 힘들었죠.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런 비슷한 회사를 제가 다녔습니다. 특히 제가 속한 부서가 여러모로 어려워지고 분위기가 좋지 못해서, 늘 긴장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제 길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교회와 ccc를 통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은혜도 받고 젊기도 하고 해서, 제 신앙이 매우 종말론적이고 래디컬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급진적이다는 말이죠.
그래서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입주일이 다가왔을 때 제가 어머니께 거기 입주하지 말고 그냥 여기 전셋집에서 살자고 했습니다. ‘굳이 집을 소유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집을 소유하면 내 신앙이 느슨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내 집 한 칸 가지는 것이 소원이셨던 어머니가 반대하시고 설득하셔서 제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어머니는 1년 정도 거기서 사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 장례 치르고 일주일 만에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어머니 천국 잘 가셨는데 슬픔 따위 감정이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는 그런 저를 보고 어떤 집사님이 조용히 불러서 그러지 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갔습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1~2년 정도 직장생활을 더 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 직장을 나와 ccc 간사로 지원했습니다. 간사훈련을 받을 때는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돕는 사람으로 평생 살아야지... 그런 마음이 많았습니다. ccc가 가르친 대로 전도하고 제자를 낳고 승법 번식을 이루면 우리 세대 안에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설익은 종말론과 래디컬한 신앙은 사역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알게 되면서... 어설픈 저의 신앙과 삶이 많이 다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삶과 열매를 가장 중요시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고 성령님이 중요하고 성경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능력도 중요하고 헌신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열정도 중요하죠... 중요한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요시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중요시하는 삶이 됩니다. 성령님을 중요시하면 그것은 결국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 됩니다. 성경을 중요시하면 성경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중요시하면 기도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대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능력을 받아서 사는 삶이 중요하고, 잠깐의 헌신과 열정의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평생 헌신과 평생 열정이 중요합니다. 전도를 잘하려면 전도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선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삶의 중요성, 열매의 중요성, 일상의 재발견...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이죠. 하나님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것을 깨닫습니다. 
성철 승려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남겼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얼핏 너무 당연한 말씀 같은데, 왜 이 말이 지금도 자주 회자될까요?
본래 도를 깨칠 때 처음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상태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수양이 깊어지고 도를 깨치면 모든 것이 역전되죠.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게 됩니다. 보이는 현실 너머를 보고 영적인 것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를 깨침이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상태를 지나, 다시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산을 산으로 온전히 알고, 물은 물로 온전히 아는 상태가 되어 도를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깨쳤다는 것은 삶과 현실을 떠나고 삶과 현실을 부정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과 현실로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가운데 이 지구 하나만 푸른 별로 빛나고 있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구와 우리 삶은 가장 큰 기적이고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픈 종교지도자가 되어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참된 삶을 무너뜨리고 헌신과 희생만 강요하는 지도자는 잘못된 지도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에는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삶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삶이 달라지고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소망이 생기고 열매를 맺는 것이 가장 큰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랑을 최고로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언하는 능력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삶을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삶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잘못된 종말론을 보았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해 어느 날 지하철에서 다미선교회 신자가 10월 28일 휴거가 온다고 외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잠시 흔들린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믿은 사람들은 일이며 돈이며 집이며 가족이며 다 포기하고 그날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한부 종말론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종말론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묻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그날의 징조를 구하지 말고 자기 삶에 충실하라...
네, 그렇습니다. 종말의 날을 안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천국의 문이 열리는 시간을 안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내가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이 있느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자기 일에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그저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여러분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주님 앞에 신실하고 충실한 삶을 가지신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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