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마 24:3~6, 10~16, 25~36, 42~44
2022.05.22.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면서 성전이 무너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내용이 두렵기도 하고 몹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은 2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임하심 즉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 끝날은 또 언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사건이 언제이고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징조가 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서 두 번째 질문이 좀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먼 훗날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을 벌써 묻다니... 좀 이상하죠.
그래서 우리가 마가복음의 동일한 본문을 살펴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이 두 번째 질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4) 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에 대해서만 묻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질문을 이렇게 두 가지로 말하고, 그래서 제자들이 성전의 종말만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질문한 것으로 말할까요?
네, 그것은 예수님의 대답이 그 두 가지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종말에 대해서만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와 누가도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마태복음은 그런 예수님의 대답을 기준으로 제자들의 질문을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2가지 내용을 질문하고 예수님이 그 2가지 내용에 대답하시고... 마태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이 24장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내용을 조금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2가지 내용으로 24장 말씀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4장 앞부분은 성전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고, 24장 뒷부분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저는 이렇게 이 24장 말씀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해석을 지지합니다.
24장 해석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주된 4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말씀은 전적으로 성전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다. 둘째는 이 말씀은 전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다. 세 번째는, 이 말씀은 성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이 반반 나누어진 말씀이다. 네 번째는,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성전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안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
네, 이 4가지 해석은 다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24장 말씀을 볼 때 대체로 이 말씀 전체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내용이 성전의 종말이고 어떤 내용이 세상의 종말이냐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이 말씀 전체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읽습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성전 멸망 사건이 이미 지나갔고, 우리에게는 세상 종말 사건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 우리만 읽는 말씀이 아니라, 1세기의 성도들도 읽었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일차적으로 성전 종말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성전 종말에 대한 말씀과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을 잘 구분하면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이 성전의 종말에 대한 말씀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해석에 동의하고, 그 해석에 입각하여 오늘 설교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그 해석에 따른 24장과 25장의 전체 구조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 24:3~35 성전의 종말에 대하여,
2) 24:36~44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3) 24:44~51 세상의 종말에 대한 첫 번째 비유(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비유),
4) 25:1~13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 번째 비유(열 처녀 비유),
5) 25:14~30 세상의 종말에 대한 세 번째 비유(달란트 비유),
6) 25:31~46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결론적 말씀(양과 염소 그리고 오른편과 왼편)
네, 저는 마태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예수님의 종말 강화를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 24장 앞부분이 어떻게 성전 종말에 대한 말씀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4~5절은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미혹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당시 예루살렘과 성전 멸망을 앞두고 실제로 많이 일어난 일들입니다. 불안한 시대였기 때문에 메시아를 사칭하는 그런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6~7절은 각종 재난과 기근과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당시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9~13절은 그런 시대 속에 당시 교회와 제자 공동체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로마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해질 때, 복음은 사람들의 거센 반발과 미움을 받았습니다. 로마제국은 교회에 대한 박해를 국가적으로 시작했죠. 그에 따라 믿는 자 중에 많은 이들이 실족하여 믿음을 떠나고 배반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짓 선지자도 많이 일어났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본질적 위기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와 신자들은 그런 대내외적인 박해와 위기와 혼란을 견디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구원도 받고, 육적인 구원도 받습니다.
14절은 우리가 지금 너무나 익숙하게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말씀으로 아는 말씀입니다. 특히 선교 쪽에서 이 말씀을 중요하게 이해하고 있죠. 그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오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성전 종말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끝은 세상의 끝이 아닙니다. 성전의 끝과 성전으로 대표되는 옛 시대의 끝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바울과 당시 교회는 로마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어느 날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어 스페인까지 가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당시에 온 세상은 로마제국으로 이해되는 세계였고, 로마제국 밖은 야만과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면 성전의 끝이 오기 전에 당시 세계 속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네, 성전의 끝이 오기 전에 당시 세계 속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 성전과 옛 믿음을 폐하시기 전에, 새 성전과 새 믿음과 새 백성을 충분히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새 것을 충분히 세우신 후에 드디어 옛 것을 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사도들과 교회들과 신자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했습니다. “끝이 오리니...” 그런데 아직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끝을 알 수 있는 보다 분명한 징조를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성전의 끝이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분명한 징조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참람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본래 다니엘서가 예언한 사건이죠. 그 사건은 BC 167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번제단 위에 이교 제단을 세우는 사건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 제단은 3년 동안 성전 안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비슷한 신성모독 사건이 성전 안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때에는 급히 도망하라는 말씀입니다.
16~20절에서 예수님은 그때에는 그렇게 급히 도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물건을 가지러 집 안에 들어가지도 말고,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지도 말고 그대로 도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포위되고 그러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21~22절은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와 공격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매우 비극적인 결과가 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신앙심을 배경으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의 주도권은 열심당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피가 발목을 적실 정도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즉 자신을 믿는 교회와 신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게 됩니다.
24~28절은 그런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멸망을 앞두고 일어나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때에 그런 위기와 불안의 시간에 예루살렘에는 그런 거짓된 자들이 많이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표적과 기사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믿는 교회와 신자까지 미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의 시간에 그런 거짓된 자를 따르는 일은 더 큰 화가 됩니다.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말해도 조금도 동요되지 말고 믿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7절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인자의 임함은 ‘파루시아’라는 말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그런데 27절은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라는 말로 시작하죠. 그래서 27절 말씀의 의미는 그때에 그런 혼란 속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은 번개가 이편에서 저편까지 번쩍이고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임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왜냐하면 인자의 재림은 그날에 번개가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누구나에게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이 말씀을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여기시면 안 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29~31절까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인용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13장과 34장에서 왔지만, 이런 비슷한 말씀은 에스겔서와 아모스서와 요엘서에서도 있습니다. 이 구약 말씀들은 말 그대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고 세상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어떤 결정적인 역사를 우주적 심판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도 그때 그렇게 실제로 오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전의 종말과 함께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그렇게 심판주로 오리라는 말씀을 10장에서 제자들에게도 이미 말씀하셨고, 이제 곧 있을 예수님의 재판 즉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31절 말씀도 세상의 종말에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 구원받은 자들을 온 세상에서 모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전이 무너지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자기 백성을 온 세상에서 부르시고 모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말씀은 구약에 여러 번 나오고 있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물리적인 성전을 폐하시고 그 대신 온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역사를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32~35절 말씀은 성전의 멸망과 관련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이른 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세계 속에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박해와 핍박 속에 공동체에 시련이 닥치고 사랑이 식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특별한 사건이 성전에서 재현되고, 각종 혼란 속에 거짓 메시아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고, 그리고 성전과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과 징조가 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래서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성전 멸망과 예루살렘 심판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전과 예루살렘의 끝이 임하는 그 시간에 피할 사람은 피하고, 또 거짓된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고, 거짓 메시아에 선동되지 말고, 잘 분별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렇게 그 성전의 종말이 다가오는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이것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제자들이 ‘그때가 언제이고 또 그때에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이 말씀은 성전의 종말과 함께 이미 실현된 말씀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 한 부분 한 부분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해드린 해석과 설명을 바탕으로 여러분들께서 이 말씀을 읽으실 때마다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성전의 종말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징조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그런데 36절부터 완전히 달라진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여기서 그 날과 그 시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다르게 ‘단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that day and that hour
지금까지 그 표현들은 다 ‘복수’였습니다. 19절, 22절, 29절... 다 “그 날들”이었습니다. 성전의 종말과 관련한 환난의 날들이었죠.
그런데 여기서부터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단수’로 언급됩니다. 42절, 44절, 50절 다 ‘단수’입니다. 네, 이것은 바로 마지막 세상 끝날, 곧 주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그리고 36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전혀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전의 종말과 관련하여서는 징조를 많이 말씀하셨지만, 세상의 종말과 관련하여서는 징조를 전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날은 갑자기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 때의 대홍수는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간 날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아무런 징조 없이 한순간에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강조점은 단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따라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종말론은 종말의 징조를 찾거나 종말의 시간표를 탐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큰 재난이 일어나면 종말이 가깝다 하고, 무슨 큰 경제위기가 닥치면 종말이 가깝다 하고, 무슨 큰 전염병이 생기면 종말이 가깝다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그날이 언제이든지 그날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오시더라도, 아무 걱정 없이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사람...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 요즘 내가 기도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쩌나... 아, 요즘 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 있는데 어쩌나... 아 요즘 내가 바빠서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있는데 어쩌나... 그런 마음이 드시면 속히 믿음의 페이스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몇 달 전 말씀으로 몇 달 전 신앙으로 살지 마시고, 오늘 신앙으로 오늘 말씀으로 오늘 기도로 오늘 회개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24장 말씀은 성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마태가 그렇게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내용을 구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의 종말에 대한 말씀에서 많은 교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반면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단 하나의 강조점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늘 준비된 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