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의‘화 있을진저’
마 23:13~33
2022.05.08.
우리는 방금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혹독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이만한 혹독한 말씀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이만큼 혹독한 다른 말씀은 딱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일들을 행하는도다...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네, 이렇게 복음서를 통틀어 단 2곳에서만 볼 수 있는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을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사두개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유대 백성의 신앙 형성에 있어 사두개인들보다 훨씬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라고 하는 이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로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이야말로 유대 백성의 신앙을 실제로 책임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모습이 매우 잘못되었고,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해 모두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말씀으로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 말씀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짝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짝이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짝이고,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일곱 번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일곱 ‘화 있을진저’ 말씀은 전체적으로 서로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의 이와 같은 구성을 생각하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첫 번째로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본래 헬라어에 문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닫는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지금 그렇게 계속 막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너희가 하늘 왕국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있다, 막고 있다, 방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막고 있다는 문제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니죠. 가장 중요한 일이 지금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설명 없이 두 번째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점에 대해 조금 알게 됩니다. 우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막고 있는 것은 ‘열심이 없거나 열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다닌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정도로 열심이 있고 부지런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교인 한 사람을 얻으면,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막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네, 그들은 그들의 하는 일로, 즉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 자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가르침과 율법 해석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 우리는 이 내용을 예수님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씀입니다.
“너희가 말하되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너희가 또 이르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이 세 번째 말씀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더 중요하게 가르치고, 제단보다 제단의 예물을 더 중요하게 가르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본질과 우선순위와 강조점이 잘못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네 번째로 이어집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본래 구약의 십일조 규정은 단순합니다. 그 해의 소산, 즉 곡식이나 열매나 짐승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주된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고,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라든지 마당의 감나무라든지 닭장의 달걀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철저하게 할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되고, 그래서 예수님도 집에서 기르는 작은 허브나 향신료 같은 식물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에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런데 여기서 ‘그러나’라는 말은 ‘그런데’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런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이런 작은 식물의 십일조까지 드린다고 한다면, 너희는 무엇보다 율법의 저 중요한 원리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의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면서, 반면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저버리는 그들의 잘못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전과 제단이 거룩하고 중요하죠. 그래서 드려지는 금과 제물은 성전과 제단 때문에 거룩해지고 귀하게 됩니다. 그것은 굳이 율법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식이고 보편적 원리입니다. 율법은 보편상식이나 원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의 금과 제단의 제물을 더 중요하게 말하고 가르칠까요? 네, 그것은 결국 그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강조하고 제단을 강조하는 것보다, 성전의 금을 강조하고 제단의 제물을 강조해야 한 푼이라도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네, 이와 같은 모습은 오늘날에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도 성전의 금과 제단의 제물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헌금을 많이 하는 분은 아무래도 교회에서 대접을 잘 받습니다. 신앙이 깊고 오래되어도 사회적 지위가 평범하고 좀 가난하면, 그리 대접을 잘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습 역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그들처럼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율법의 근본과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율법은 결국 무엇을 지향하고,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런데 과거 우리를 돌아보면, 때로는 비전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비결이자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어떤 때는 능력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능력을 받아야 신앙생활도 잘 하고 우리 삶도 나아질 것 같았습니다. 능력 중에서도 기왕이면 신비적인 능력이 더 좋죠.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고 환상을 보고... 그러면 나는 영적인 수준이 높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이 최고의 은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사랑하고 섬기는 것보다 방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축복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죠. 축복을 늘 입에 달고 삽니다. 그리고 “네 입을 넓게 열라...” 축복도 믿음으로 받는 거라고 말합니다. 축복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맞는 말일까요?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많이 섬기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일 잘하는 사람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가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죠.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 해결되고 하늘 문이 열리고 신령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 기도가 얼마나 성경적인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비전일까요? 축복일까요? 능력일까요? 기도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십일조일까요? 십일조만 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을 내려주실까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제 예수님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말씀으로 넘어가십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말씀은 이렇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그러면서 너희 이익과 관심을 따라 사소한 율법을 강조하고 가르쳐왔기 때문에... 그 결과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 결과 신앙과 삶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겉은 깨끗한 그릇이지만, 안에는 인간 본연의 더러움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탐욕, 방탕, 이기심, 남을 속임, 자기를 속임, 이중 잣대, 뻔뻔함...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이고, 어느 순간이 오면 나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대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변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화감독 중 홍상수 감독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작품에는 그분이 생각하는 현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들어있습니다. 고귀하지 않은 인간, 찌질한 인간... 그분은 멋진 배우들에게 그런 배역을 연기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추한 것들을 벗고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겉과 속은 일치될 수 있을까요?
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그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보다 나아지고, 겉과 속이 일치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겉과 속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일, 이것을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지행합일’이고 ‘언행일치’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고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의 용어로 말하면 열매입니다. 우리는 결국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많은 말씀 속에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중심장인 13장에는 결실을 맺는 씨뿌리는 비유가 있고, 혼인잔치 비유의 예복과 열처녀 비유의 기름도 다 열매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와 같은 마태복음의 열매를 한 단어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삶입니다.
이것을 구약적으로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가 결국 말하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준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말씀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것, 지행합일, 언행일치, 열매, 삶, 계명 준수... 이 모든 것은 같은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능력 받고 축복 받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도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비전을 품는 것도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고 천국 가는 것도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것은 신앙생활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겉과 속을 하나가 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라가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신앙과 삶은 겉과 속이 일치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실천과제는 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마음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생각과 삶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말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만 말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만 말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직접 자기 손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자신의 수고마저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은혜를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통해 새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은혜만 받고 끝나는 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은혜만 받고 끝나고, 은혜만 말하고 끝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고, 나아가 그런 깨끗함이 겉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꼭 열매가 있고 삶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이 남았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너희는 우리가 그때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 말하지만, 결국 너희는 선지자를 죽이는 죽인 자의 자손이고 그 분량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막고 하나님의 나라를 잘 못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의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만들었으니, 그 결과 너희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거부하고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거부하고 죽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최종적인 모습은 반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룟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반역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은 그들의 신앙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잘 못 믿으면, 이런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닫히고, 본질을 잃고, 사소한 것이 중요시되고, 겉과 속이 다르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신실한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