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전쟁과 예비하신 피난처
계 12:5~17
2022.05.06.
지난 주에 우리는 여자의 정체와 용의 정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여자는 영적인 이스라엘, 즉 교회이고, 용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악의 실체, 즉 사탄입니다.
용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고,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태어날 아이를 삼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탄의 공격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드디어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용은 여자에게로 눈을 돌리고, 여자는 용의 위협을 피해 광야 하나님의 예비하신 처소로 도망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처소가 어디인지 말하기 전에 한 새로운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 새로운 내용은 7~12절에 나오는 하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여자의 도피와 그 도피처에 대한 말씀은 13절 이후에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하늘의 전쟁을 살펴보고, 이어서 그 도피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절부터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전쟁을 말씀합니다. 이 전쟁은 미가엘을 중심으로 한 천사들과 사탄을 중심으로 한 악한 천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여기서 천사 미가엘이 나오는 것은 이 본문이 다니엘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고 왜 일어난 전쟁일까요?
이 전쟁은 앞서 4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태고적 사탄의 반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4절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전쟁은 태고적 전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부활 승천을 통해 촉발된 하늘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지금 요한계시록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이 해석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늘의 전쟁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상으로 벌인 지상의 전쟁이 하늘의 영역으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오래전 태고 적에 하나님을 반역하고 쫓겨났지만,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취임하신 이후 사탄은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하늘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됩니다. 이 하늘의 전쟁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 하늘의 전쟁은 실제 하늘에서 천사와 사탄 간에 그런 실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비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실제 하늘에서 천사와 사탄 간에 전쟁이 일어나서 칼이나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생명책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죠. 실제 하나님의 보좌에 그런 생명책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하늘 전쟁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일어난 어떤 영적인 사건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이 하늘 전쟁은 사탄이 하늘 즉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패배는 바로 법정에서의 패배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10절과 11절 말씀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믿는 자들을 참소했습니다. 사탄은 늘 그런 일을 하는 존재이죠. 그 이름대로 그는 고소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 하나님께 우리를 이렇게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죄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합당치 않고 마땅히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이런 사탄의 고소가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사탄의 이런 참소가 하늘에서 무력화되었음을 말하는 비유입니다.
네, 사탄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이제 여자, 즉 지상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여자는 사탄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광야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장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그곳에서 1,260일 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됩니다. 이 기간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전 종말의 시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들이 종말에 보호받고 양육 받는 그 장소는 어디일까요?
네, 그 장소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장소라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영적인 장소는 어디일까요?
혹시 교회일까요? 그러나 여자가 교회인데 여자가 피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일까요?
이 영적인 장소를 이해하는 3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첫째는 ‘광야’이고, 둘째는 ‘독수리 날개’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그 장소를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단서를 가지고 찾아야 합니다.
광야라는 말에는 워낙 많은 의미가 있죠. 그러나 독수리 날개로 날아간 광야라는 말씀은 뭔가 특정 구약 말씀을 암시합니다. 네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광야 시내 산 앞에 이르게 한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19: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아갔고, 그 광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출애굽 배경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에서 요한계시록의 이 광야는 종말론적인 출애굽의 광야입니다. 이 광야는 고난과 시련이라는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출애굽의 광야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영적인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출애굽의 광야란 의미는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시도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에세네파 및 쿰란공동체는 부패한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들어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예수님도 공생애를 광야에서 시작하셨고, 사역의 위기 때마다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 및 성전당국과 싸우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종말론적인 광야 생활을 하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여자가 광야로 도망간다는 말씀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이 되어버린 곳을 떠나 영적인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떠날 세상은 어디일까요? 교회 밖이 세상이고 주일 외 6일이 다 세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내 마음에, 우리 교회 속에 영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보다 더 불신자 같은 신자가 있고, 그런 목회자가 있고,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바로 살지 않으면 바로 내 삶이 세상이고 내가 세상이고 교회가 세상입니다. 그런 신자와 교회는 사탄의 공격을 늘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광야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곳은 광야 중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세상을 떠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그 특별한 장소로 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장소를 예비하셨다는 말씀에서 또 다른 성경적 단서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단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네, 그것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3)
이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를 위해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후 성령님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이 오셔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고 너희 속에 계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히 안전한 그 거처의 지상적이고 임시적인 거처는 바로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우리의 영적인 거처입니다. 성도들은 그곳에서 보호받고, 인내하고, 유혹을 이기고, 분별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이 우리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주권적으로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임재는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을 떠나 늘 광야로 나아가시고, 성령의 임재와 내주하심 가운데 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