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부활에 대한 사도바울의 말씀

믿음찬교회 0 221 2022.04.19 14:40
부활에 대한 사도바울의 말씀
고전 15:3~8, 12, 35, 58
2022.04.17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15장 전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른바 ‘부활장’으로, 부활에 대해 가장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신약성경입니다. 이 내용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낸 여러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때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 가운데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 말씀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부인하는지, 또 그 배경엔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지, 영의 부활은 믿지만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지, 아니면 믿는 자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인지... 학자들은 그간 많은 연구를 했지만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전혀 부인하는 사람이 과연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그 사람들은 부활 자체를 부인하기보다는 몸의 부활을 부인하거나 부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들의 정확한 모습에 대해선 아쉽게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쉽지만 몰라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관련 부활에 대해 설명하는 사도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로서, 영감 받은 성경 저자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으로서, 그 어떤 사람보다 우리에게 부활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는지... 오늘 본문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말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가 AD 55년경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5년 정도 지난 시간입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당시 시대를 감안한다면 부활을 의심한다면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바울은 1~11절까지 첫 번째 내용을 통해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의 사실성과 관련하여 먼저 말하는 내용은 당시 초대교회 안에 확립된 신앙고백입니다. 그 신앙고백은 3~5절에 나오는 4개의 문장입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셨다” 네, 우리말 성경은 이 4개의 문장이 잘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원어로 보면 ‘호티’라고 하는 영어의 ‘that’구문으로 잘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4개의 말씀이 당시 초대교회 안에 확립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신앙고백을 본인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시 교회들은 이 신앙고백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그런 짧은 시간 안에 교회들 안에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부활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큰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가장 먼저 당시 교회의 신앙고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부활의 사실성과 관련하여 자신이 아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잘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의 많은 목격자들입니다. 바울은 이 많은 부활의 목격자들을 통해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사건이 일어난지 25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많은 사람이 당시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의 말은 간단합니다. 의심이 들면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것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삶과 증언을 보고 부활의 사실성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말하는 그 사람들은 놀랍게도 처음엔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날 새벽 무덤에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었죠. 열두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숨어있었고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환상이나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그분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현실로 믿게 되었고, 부활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눈부신 빛이 비췄고, 주님이 나타나셨고, 음성을 들었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코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고, 같이 가던 자들도 땅에 엎드러져 그 신비한 일을 같이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모든 지식과 믿음과 세계관이 깡그리 무너졌습니다. 지구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캄캄한 우주 공간에 있게 된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런 사람의 한 사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1:1~2)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1세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과정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의 사실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그들에게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기리고 추모하는 모임은 생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시작될 수는 없습니다.
시작될 수 없는 기독교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없고, 믿음도 헛되고, 박해받는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들에게 부활의 미래를 말합니다.
이것은 20~28절 말씀인데,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로 일어날 부활의 미래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부활할 것이고, 그리고 그 후에 우주의 마지막 대단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종결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받으셨던 하나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게 됩니다. 그 때에 모든 원수는 굴복되고, 사망도 굴복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에 대한 성경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말하는 역사와 우주는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역사를 무의미의 반복으로, 우주를 무의미의 시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시간도 공간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그들에게 부활을 부인함으로 도덕적인 오류와 무의미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을 부인하면, 그 끝은 결국 2가지가 됩니다. 인간은 무의미에 빠지고 동시에 도덕적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네, 정말로 이것을 믿는다면,  인간이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하죠?, 아무런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데 작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똑똑한 사람은 자살하거나,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사피엔스’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책이 30여개 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고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읽었다고 해서,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책의 내용은 우리 인류 즉 사피엔스 종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여러 분야를 망라하는 지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을 읽는 가운데 저자의 사상을 알게 되고 무척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람과 여타 생명체를 구분하지 않았고 구분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는 역사에 의미가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우리의 정신, 가치와 신념, 신과 종교, 사회질서와 제도 등 모든 비실재적인 것들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만든 산물이자 허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지금 그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책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낱 이 시대의 지식인의 말보다, 성경말씀과 바울사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네, 이것은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에 대한 바울의 도덕적인 설명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29~34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바울은 그들에게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35~49절까지 말씀입니다. 아마 그들은 부활은 부인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네, 이와 같은 그들의 말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썩어 없어지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부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선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원리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이기도 하고 영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씨는 죽어야, 싹이 날 수 있습니다. 씨와 싹은 연속성도 있지만 단절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씨와 싹은 결코 같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식물이나 자연만물이나 사람이나 각각 그 현재의 모습에 알맞은 형체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씨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싹을 주신 것도 하나님입니다. 씨가 스스로 싹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씨가 스스로 싹이 되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어떤 본질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화하는 현상은 씨만이 아닙니다. 나비도 그렇고, 오늘 우리가 먹는 달걀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설명은 비록 과학적이지는 않아도 억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부활도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절)

한편 여기서 바울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따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보다 원어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육의 몸은 혼적인 몸이고 영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혼적인 몸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로 만들어진 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몸은 하나님의 새창조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만들어진 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날에 그 영적인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을 단순히 그렇게 스스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45절을 보시면, 바울이 이 사실을 창세기 말씀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창세기 말씀을 통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설명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서 우리에게 혼적인 육의 몸을 주신 것처럼, 이제 그날에 새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신령한 몸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부활의 새 몸의 현실성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그날에 이루어질 부활의 비밀을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날에 이루어질 이와 같은 부활의 비밀은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현실입니다. 거기는 인간의 언어가 끝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초현실이 비현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은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작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는 초현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초현실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압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계속 밝혀내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차원도 있고, 미시세계에는 전혀 다른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2차원에 사는 사람은 3차원의 세계가 신비하고, 3차원에 사는 사람은 4차원의 세계가 신비합니다. 그런 점에서 불과 시공간의 3.5차원에 사는 작은 우리가 보다 높은 차원의 초현실을 이해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초현실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누구보다 치열한 현실로 살면서도, 동시에 그날을 바라보고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무조건 믿으라 하지 않고, 최선의 설명을 하였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그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는 사람은 믿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습니다. 이후 부활은 믿음의 문제가 됩니다. 
바울은 15장의 내용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네, 이 말씀이 부활에 대해 말씀한 바울의 결론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도 2,000년전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의 부활로 믿고, 그래서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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