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바깥마당과 두 증인
계 11:1~13
2022.04.08.
우리는 지난주에 성전과 성전 바깥마당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두 증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42달과 1,260일이 어디에서 온 숫자인지... 이런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짓밟히는 성전 바깥마당과 예언하는 두 증인은 종말의 교회 공동체와 신자들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교회 시대를 예언한 책으로 보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다르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로 문자적으로 또 주로 최후 미래로 보는 해석도 있죠.
그런 해석에서는 오늘 본문의 두 증인을 미래의 최후 종말에 나타날 실제적인 두 인물로 이해합니다. 적그리스도를 미래에 나타날 실제적인 인물로 보는 것처럼 말이죠. 그 해석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 해석은 최후 종말의 어느 시점에 이스라엘 유대인 가운데 어떤 두 증인이 일어나 크게 예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두 증인을 이스라엘 유대인 가운데 나타날 인물로 보는 이유는 이 말씀을 로마서 11장 말씀과 연관지어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은 마지막 때에 온 이스라엘이 돌아와 구원받으리라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형제들아 ...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
그래서 그분들은 그 두 증인을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전할 최후의 예언자들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두 증인의 예언 사건을 종말의 시간표의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최후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 두 증인에 대한 말씀이 과연 미래에 그런 실제 인물이 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로마서 11장 말씀도 그것이 실제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대규모 회심으로 나타날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즉 그 말씀은 그렇게 성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로마서 말씀에 대한 해석과 전망은 아직 논란 중이고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말씀과 별개로, 이 두 증인의 실제 출연을 회의적으로 볼 단순한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 11장의 진술이 비유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비유적이라는 것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과 비유가 의도하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11장이 비유적인 말씀이라는 것은 몇 가지만 살펴봐도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1절에서 요한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아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문자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라면 그 갈대로 성전과 제단은 측량한다고 해도 사람은 어떻게 측량하는 걸까요? 몸이나 키를 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나 마음을 잰다는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측량한다는 것도 실제로 측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측량을 통해 그 사람을 자기 소유로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밖에 이어지는 내용에 그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도,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도, 물을 피로 변하게 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도, 또 그들이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도 문자적이거나 사실적인 묘사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증인을 실제 인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왜 한 증인이 아니라 두 증인일까요? 네, 그것은 증언의 확실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가 마지막 때에 세상을 향해 확실하고 참된 증언과 예언을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한편 성전 바깥마당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짓밟히는 성전 바깥마당을 종말에 교회의 일부분이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해석했죠.
그러나 다른 해석은 이 성전 바깥마당을 교회 공동체 가운데 믿음이 불완전한 신자나 불경건한 신자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성전 바깥마당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죠. 이렇게 해석하여 마지막 때에 우리는 열심과 헌신과 충성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불완전한 신자나 불경건한 신자나 또는 약한 신자나 충성하지 않는 신자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여기서 요한이 바라보는 성전은 헤롯 성전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은 그 구조가 제사장의 뜰, 이스라엘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복잡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깥마당인 이방인의 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헤롯 성전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여기서 바라보는 성전은 결코 헤롯 성전이 아닙니다. 요한이 염두에 둔 성전은 종말론적인 최후의 성전인 에스겔 성전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은 그 구조가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모두 성전의 거룩한 영역입니다. 그것은 처음 성전인 솔로몬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깥마당이라 해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의 의미를 참된 신자와 그렇지 못한 신자로 구분하거나, 충성하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깥마당이 해를 입는다는 말씀은 교회가 종말의 시간 동안 그 생명과 본질에는 타격이 없지만 그 일정 부분은 계속 고난과 박해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11장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11장 말씀은 10장 말씀의 반복이자 연속입니다. 일곱째 나팔이 불리기 전에 절정에 달하는 교회의 초라함과 패배는 성전 바깥마당(교회)의 42달 동안의 짓밟힘과 두 증인(교회)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요한의 예언 사역은 두 증인(교회)의 예언 사역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10장과 11장은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시간 동안 교회는 세상 속에서 고난과 패배를 당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향해 예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10장과 11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서 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고 교회의 참된 예언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두 가지 내용입니다. 교회와 신자의 세상 속에서의 고난과 세상을 향한 예언...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종말에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에서 올바른 고난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은 모두 세상에서의 승리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성공하고 복 받고 잘 되라고 말합니다. 목회자들도 성도들을 잘되게 하는 것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물질적 축복과 인간적인 메시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에서 자유로운 교회와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우리는 참된 교회와 신자가 세상 속에서 패배하고 몰락한다는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고 잘되고 세상의 중심에 서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신앙과 공동체가 되기를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해야 합니다.
이 예언은 말과 행동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교회와 신자는 그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와 신자는 말로는 전도에 열심이지만, 그 존재와 모습으로는 예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빛을 가립니다. 일부 교회와 신자는 그런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모습과 삶으로 예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언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와 우리 교회는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을 위한 참된 예언과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