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성경을 모르는 사두개인들

믿음찬교회 0 334 2022.04.05 16:44
성경을 모르는 사두개인들
마 22:23~33
2022.04.03.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는 네 분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열심당, 에세네파, 그리고 사두개파입니다. 잠시 이 네 분파를 소개하면...
첫 번째로, 바리새파는 BC 4세기경에 시작된, 예수님 당시 가장 큰 분파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로, 이들은 율법을 중시하며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구약 전체와 장로들의 유전을 신봉하고 부활을 믿는 진보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근본주의와 진보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형식주의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근본적이면서 진보적이고 또 그러면서 형식적인... 묘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열심당은 AD 6년경 로마의 세금 부과에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유다에 의해 만들어진 분파입니다. 열심당은 열심, 열정이라는 의미이죠. 이들은 율법을 수호하고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헌신하면서 로마에 대해 강경 무장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극단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에세네파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러 자료와 증거에 의해 예수님 당시 존재했다고 알려진 분파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가 오염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혹 이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이들은 엄격한 금욕과 은둔생활, 철저한 성경연구, 그리고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네 번째로, 사두개파는 BC 2세기경에 만들어진 분파로, 일부 제사장들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이름을 따와 만든 분파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제사장 및 다수의 제사장 그리고 유대 귀족으로 이루어진 기득권층이 되었죠. 예수님 당시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리새파와 함께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모세오경만을 믿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모세오경에 없는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나 사탄 등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역시 바리새파처럼 묘한 모순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수적이면서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 안에는 이런 4개의 분파들이 복잡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파 중 하나인 사두개인들이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 선생님으로 부르면서 부활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의 내용은 한 율법 전통을 통해 발생되는 부활 문제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는 계대결혼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부인이 남편의 형제를 통해 자손을 잇는 전통이죠. 이 전통은 실생활에서는 그리 많이 실천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제도와 전통으로서는 계속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만약 한 부인이 그런 식으로 여러 형제와 계대결혼을 하면, 나중에 부활 시에 그 부인은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자 당시 신학적 난제였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사실 답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그들을 향해 비판과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그들은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백성들 앞에서 조롱하고 불신을 당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이 질문이 어떤 질문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첫 말씀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이 말씀은 단지 그들의 이 질문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평소 그들의 잘못된 모습과 신앙을 향한 날카로운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 2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중 하나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희가 성경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이게 얼마나 그들에게 모욕적인 말씀인지... 아시다시피 그들은 토라 즉 율법서라고 하는 모세오경 신봉자들입니다. 다른 구약성경인 역사서나 예언서나 시가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토라만을 읽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그 토라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토라만 보기 때문에 그 토라의 말씀을 가지고 지금까지 어느 랍비나 서기관도 말하지 않은, 부활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본문은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앞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본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그 세 사람의 이름으로 소개하신 말씀에 주목합니다.
모세 당시 그 세 명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죠. 그런 점에서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크게 2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의 언약의 확실성에 문제가 됩니다. 언약은 상대방이 살아있을 때 유효하고 확실합니다. 언약의 상대방이 죽으면, 그 언약의 영원성과 확실성은 손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도 아니시고, 죽은 언약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과 영원한 언약에 기초한 예수님의 성경 해석과 설명은 사두개인들을 꼼짝 못 하게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그 정도로 모세오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사두개인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일까요? 성경을 그렇게 읽고 외우고 연구하여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모르고 부활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의 작은 규정까지 아는 전문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소경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모세오경에 부활이 없으니 부활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덮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열린 책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닫힌 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바르게 나아오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은 봉한 책의 말씀이 됩니다. 이사야서가 그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사29:9~11)
모세오경만을 고집하고 기득권적인 삶에 안주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닫힌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두개인들을 향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고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읽고 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뜨겁고 열정적이어도 하나님 말씀을 모르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됩니다. 그렇게 충성하고 열심이던 신자가 어느덧 바람에 날려 교회와 신앙 밖에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오랫동안 사도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지만, 어느 날 그는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데마처럼 요즘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시대가 그런 시대이고 또 교회가 잘못하는 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젊은 아기 엄마가 커뮤니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제목은 ‘기독교 자체가 가스라이팅 아니냐...?’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가면 항상 죄인이래. 죄인이라고 하나님이 그 죄를 떠안아주고 사해주는 거니 믿으래. 하나님이 내 죄 때문에 고문 당했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먹어서 원죄라는데 나도 이십대 때 교회 다닐 때 심적으로 너무 그 교리가 되게 사람 자체를 약하게 하는 것 같아서 힘들더라고. 감사헌금, 건축헌금, 헌금 봉투는 열 가지는 되던데 지갑에 현금 금방 사라지더라. 지금 아기 키우면서 느끼는 건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데 무슨 원죄야 원죄는”
이 분이 말한 이 내용 중에는 사실도 있고 오해도 있습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항상 죄인이라고 말하는 내용, 원죄를 가졌다는 내용... 그것이 가스라이팅처럼 사람을 약하게 하고 죄의식을 갖게 한다는 말에 일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헌금을 내도록 조장한다는 말에 일부 저도 동의합니다. 일부 교회들 안에는 그런 잘못된 모습과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죄인 된 것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균형 있게 말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노예의 종교가 아니라, 용서받고 회복된 아들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인간의 죄를 가지고 장사하는 곳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제가 이분의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분의 글을 목사로서 교회 입장에서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분이 왜 이런 글을 쓰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분은 그런 글을 남기고 신앙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그분의 글에 맞는 말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그분이 잘못한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다녔지만, 그 기간 동안 자기 신앙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말하고 목사님이 말하는 것만 들었지, 자기 스스로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그래서 자기 신앙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느 날 바람이 불었고, 그분은 그 바람을 따라 생각이 달라졌고, 교회의 몇몇 문제들이 보였고, 마침내 교회를 떠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어려운 시대 속에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닫힌 책이 되어선 안 됩니다. 동시에 교회가 말해주고 목사님이 말해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읽은 내 말씀이 되고 내가 믿는 내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신앙의 첫 발걸음은 그렇게 말씀이 내 말씀이 될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내 말씀이 되고 내 신앙이 되고 내 삶이 되고 내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열정은 매우 높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에 힘쓰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한국교회는 이런 신앙적 열정이 매우 뜨겁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신앙을 평가할 때 잘 말하지 않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의외이시죠?
‘아~ 한국교회 만큼 말씀이 풍성한 교회가 어디 있느냐~’ 하실 수 있지만, 말씀이란 말을 성경에 대한 이해로 바꾸면 금새 수긍이 갑니다.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 즉 성경 이해에 약합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우리 민족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착하고 심성이 곱고 정서가 풍부하고 흥이 있는 반면에, 이론에 좀 약하고 깊이가 좀 약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한국교회는 말씀사경회보다 부흥회를 더 선호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대체로 미국교회로부터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배우고 도입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유학을 가서 신학을 배우고, 목사님들은 큰 미국교회를 방문해서 교회 사역과 프로그램과 성령사역을 배우고 ...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배우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미국 교회는 주일날 예배만 있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주일날 예배도 하고 교육도 하고 회의도 하고 찬양대 연습도 하고... 그렇게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죠. 그러면 미국교회는 그런 일을 언제 하느냐... 네 보통 평일에 다 합니다. 그리고 그 평일에 모이는 모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성경공부반입니다. 그래서 미국교회 성도들은 한국교회 성도들보다 성경공부를 훨씬 충실하게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잘 안다, 성경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 지식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쭉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성경을 쭉 읽어낼 수 있는가... 그것을 잘 하셔야 성경을 잘 아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반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신학을 한 목회자들까지 성경을 쭉 읽는 능력을 갖춘 분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쭉 읽어나가지 못하죠. 마치 법전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집니다. 소위 몇 장 몇 절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앞 뒤 연결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이건 성도들이건 성경말씀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밖에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쭉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 통독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읽을 때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밝혀주시고 비춰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 성령께서는 그런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에 동시에 역사하시면서 우리를 바꾸어 나가십니다. 마음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욕심도 없어지고 믿음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 중에 성경말씀을 우리 마음 가운데 비춰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만큼 중요한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모르고 이해가 부족하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자꾸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힘으로 역사하시는 분으로 추구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자꾸 뭔가를 보려고 하고, 꿈 같은 것을 꾸려고 하고, 은사나 신비 체험을 하려고 하고,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 역사해주시길 바라고... 한국교회가 그간 그런 신앙생활을 많이 추구했습니다.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능력만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없이, 단지 성령의 능력만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선수가 힘만 기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영적인 불균형을 갖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쭉 읽어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쭉 읽어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 사탄이 역사와 이 종말의 악한 세상과 그리고 그 속에서 분투하는 신자의 삶이 보입니다. 종말에 교회와 신자는 연약하고 초라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소망과 비밀이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에베소서나 빌립보서 같은 짧은 바울 서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서신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 있는 매우 어려운 말씀인 하늘의 권세이니 주권이니 예정이니 선택이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과 삶을 향한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권면들입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 신앙인지... 우리가 바울서신을 쭉 읽으면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깊이 은혜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읽어야 성령이 역사하고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소 성경을 쭉 읽으시는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이 책 저 책 좋은 책도 많이 있긴 하지만, 성경 말씀만큼 영감된 책이 없습니다.
저도 한 때 이런 저런 책을 많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적당히 보려고 합니다.
자기 서재에 만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어떤 지식인이 있는데, 어느 분이 그분의 집에 방문하여 그 서재와 책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요즘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답하기를 요즘 잡초에 관한 책을 본다고 대답했습니다. 만권의 책과 만권의 지식의 향연의 끝이 잡초라니... 하나님 말씀이 없는 사람은 결국 무익한 것만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평소 성경을 사랑하시고 쭉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도 달라지고, 하나님의 귀하신 손길이 언제나 여러분의 삶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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