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 22:15~22
2022.03.2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3가지 비유에 이어, 이제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3가지 논쟁과 대결이 펼쳐집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논쟁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논쟁으로 포장한 덫이자 올무였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다 올무에 걸리도록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 해도 걸리고, ‘옳지 않다’ 해도 걸립니다.
‘옳다’ 하면 왜 올무에 걸릴까요? ‘옳다’ 하면 유대 백성들의 정서를 거스르고 반감을 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금 문제는 오래된 매우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로마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즈음 유대인들에게 이 세금을 매겼습니다. 이 세금은 켄소스라고 하는 인두세인데, 로마는 자기 로마인들에게는 이 세금을 거두지 않고 오직 속국의 피지배 백성들에게만 이 세금을 매겼습니다. 그래서 이 세금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굴욕적인 세금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신앙적으로도 굴욕적인 세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세금이 매겨졌을 때 유대인들은 상당히 반발했고, 그 결과 로마에 대한 각종 반란과 폭력적으로 항거하는 유대 열심당 운동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과 열심당에 대한 지지는 시간이 갈수록 계속 높아져 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 하면 예수님과 유대 백성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옳지 않다’ 하면 또 왜 올무에 걸릴까요? ‘옳지 않다’ 하면 이번에는 로마 당국에 걸리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런 말을 하기만 하면 그 즉시 빌라도에게 고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로마 당국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구덩이를 파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후자의 대답을 하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자칭 메시아이고 신앙적이고 애국적인 인물이니까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리라 예상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의 의도를 예수님은 잘 아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참 악하고 간교한 자들이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이렇게 예수님 앞에 덫을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굉장히 타락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면서 ‘존경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면서 비수를 꽂는 것이죠. 마치 그날 밤 예수님의 뺨에 입을 맞춘 가룟 유다의 모습과 같습니다.
여러분, 슬프게도 지금 우리 세상은 이런 악한 모습이 더욱 만연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고, tv나 뉴스로 간접 경험하기도 합니다. 돈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타락하고 악마화되는 모습입니다. 웃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속이면서 사람을 무너지게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도 이런 수많은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이런 인물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런 악한 모습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깨어있는 신자입니다.
선하신 예수님께서 악하고 교묘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는 것은 매우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금 낼 돈이란 바로 로마의 동전을 말하죠. 거기엔 로마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테두리에 이런 글자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디비 아우구스티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이 뜻은 티베리우스 가이사,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뒷면에 이런 글자도 새겨져 있습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 이 뜻은 대사제 혹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종합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 대제사장이다” 네, 티베리우스 황제를 신격화하는 문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급적 이 로마 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유대 지역에서는 황제의 형상이 없는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전을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질문을 한 그들 중 한 명이 가지고 있었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들은 이 우상숭배적인 돈을 가지고 지금 버젓이 성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올 생각을 할까요? 더구나 이 거룩한 유월절 기간에 말이죠. 요즘으로 말하면, 부적을 지니고 버젓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가증하게도 지금 이렇게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동전을 받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 예수님의 대답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들은 아무런 말을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은 위기를 모면하는 단순한 지혜인가? 아니면 어떤 진리가 담겨있는 말씀이자 가르침인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후자이죠.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는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귀한 진리가 담긴 말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드려야 한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삶과 일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살아가던 낡은 관념체계를 깨뜨리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대체로 그들은 신앙과 일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죠.
일례로 그들은 안식일 준수를 위해 전쟁 중 안식일 날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안식일 중 안식일을 택한 것입니다. 이를 안 로마군이 안식일에 공격했고 그들은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이런 일례도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부모님께도 효도하고 하나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몇몇 유대인들은 부모님을 도외시하고 하나님만 사랑했습니다. 바로 고르반 전통이죠. 그들은 그 전통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잘못된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처음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도 이런 혼란이 있었습니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이란 분이 있습니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정약용의 전도로 천주교에 입교한 인물입니다. 이분은 세례를 받고 당시 청나라 북경으로 가서 견진성사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신실한 분이었기 때문에, 이분은 당시 교리였던 천주교의 제사금지령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모친이 돌아가셨는데, 위패를 불패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결국 조정에까지 보고되고, 당시 봉건적인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매우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결국 윤지충과 고종사촌 권상연은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는 신유박해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인 천주교의 제사금지령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처음에 중국 선교를 한 예수회 소속 신부들은 중국의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선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었죠. 명나라와 청나라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중국 선교를 시작한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크회 소속 신부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예수회가 많은 것들을 신앙적으로 타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조상제사 문제를 가지고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그것을 부모를 공경하는 중국의 전통 관습이자 문화로 보았지만,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크파는 그것을 우상숭배로 보았습니다. 오랜 논쟁과 번복 끝에 1704년 로마교황 클레멘트 11세는 결국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윤지충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은 처음에 천주교를 믿을 때부터 조상제사는 잘못된 것이라 배웠습니다. 물론 지금 천주교는 제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비록 역사를 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교황청과 신부들이 이 문제를 달리 판단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내용도 물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부모와 조상들에 대한 효와 사랑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오늘 말씀 즉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돌리는 원리’를 적용하여 좀 더 유연하게 결정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불필요한 박해도 없었을 것이고 선교는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선교에 있어서 조상 제사 문제뿐만 아니라 왕 문제도 있었습니다. 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봉건적인 국가에 선교하면서, 인간 왕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왕으로 인정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하면... 선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선교가 될 수 없고 엄청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냐 왕이냐, 하나님이냐 대통령이냐 하는 선택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왕은 왕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죠. 우리는 왕과 대통령을 존중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선교 초기에는 당시 시대적인 한계와 이와 같은 성경이해 부족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혹독한 시간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와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은 그와 같은 초기의 선교 문제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좀 더 그 시대와 나라와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고 선교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별하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삶과 신앙의 중요한 원리로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원리를 삶과 신앙 속에 잘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지인 분의 카톡에 한동안 이런 카톡 메시지가 올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네, 그분은 평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분이시고, 그래서 저는 그분이 어떤 의미로 그렇게 올리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혹시 너무 지나치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런 믿음이 너무 지나쳐서 혹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현실 속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가이사를 구별하는 문제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100% 완벽하게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그것은 신앙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면서 동시에 어떤 것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신앙과 현실을 구분하면서, 또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잘 구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서울 사랑의 교회가 예배당을 무리하게 건축한 일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왜 사랑의 교회는 공공도로 지하를 파고 교회 건축을 진행했을까요? 직접적인 이유는 그 공공도로 지하를 건축에 넣지 않으면, 예배당 형태와 규모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건축을 강행한 분은 오정현 담임목사였는데, 그분은 “일반법 위에 도덕법이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건축을 강행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말한 영적 제사법이라는 말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주장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사회의 법과 제도와 질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사업과 일이 더 중요하다...’ 네, 이렇게 그분은 건축을 강행했고, 아직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있습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목사님들 중에 오정현 목사와 비슷한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가 중요하지,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잘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회나 세상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코로나가 심할 때는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리고, 교회는 건축할 때 법과 제도를 잘 지키고, 목사님들은 소득에 대해 세금 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교회의 재정 회계도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 맞게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가족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잘하고 가정이나 가족을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우리 믿는 자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넉넉하고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헌신 때문에 간혹 가정을 돌보지 않고 가족을 희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록 과거엔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우리는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신자이면서 좋은 사회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존중하고, 법과 제도를 잘 준수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과 역할에서 전문인이 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소금과 빛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제가 단골로 다니고 있는 치과가 있는데, 항상 그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치료를 잘 해줍니다. 치료비도 적당하고 정직하게 치과를 운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금니 크라운 시술을 받았는데, 제작이 잘못되어 세 번이나 금니를 다시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하면서 끝까지 책임 있게 잘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죠.
그러나 간혹 자기 자리에서 비양심적이고 성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늘 안타깝게 기억하는 신학교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생들 정오 기도회도 인도하시고 성령사역도 하시고 학회나 교단 등 대외활동도 많이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 훌륭한 교수님이셨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작 본인이 맡은 강의는 열심히 안 하셨습니다. 그 중요한 신약학개론Ⅱ를 주마간산으로 지나가서 새롭게 깨닫거나 배우는 내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도 설마 했는데, 기말시험 문제로 몇 년 전 문제를 그대로 출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만 의무를 다 할 것이 아니라, 사회와 세상과 이웃과 가정 속에서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판검사도 하고 공무원도 하고 선생님도 하고 사업가도 하고 기술자도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은 잘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는 내용을 좀 더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아무쪼록 세상과 시대 속에 의무를 다하시고 또 하나님께 의무와 충성을 다 하시는 신실한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