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두루마리와 예언
계 10:5~11
2022.03.25.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10장과 11장은 6번째 나팔이 불리고 7번째 나팔이 불리기 전에 어떤 설명을 위해 삽입된 장입니다.
그래서 10장과 11장은 불신자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한 힘센 특별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천사는 2가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첫째는‘마지막 나팔을 불려고 할 때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이란 바로 교회의 패배와 몰락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패배와 몰락이 세상에서 절정에 달할 때 드디어 마지막 나팔이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우리 교회들은 올바르지 못한 성장이나 승리가 아니라, 올바른 패배와 몰락을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주의나 회의주의가 아니죠.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패배를 안고 그러나 신실하게 이 마지막 때를 통과해야 하겠습니다.
천사의 두 번째 메시지는‘두루마리를 먹고 다시 예언하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우선 이 두루마리는 어떤 두루마리일까요?
우리는 5장에서 어린 양이 받으신 두루마리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그 두루마리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죠. 그러자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찬양과 경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심으로 이후 요한계시록의 사건과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면 혹시 5장의 그 두루마리와 10장의 이 두루마리는 같은 두루마리일까요? 네,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어린 양이 받으신 그 중요한 두루마리를 지금 요한에게 준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10장도 이 두루마리를 ‘두루마리’라고 하지 않고 ‘작은 두루마리’라고 분명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어로 살펴봐도, 5장의 두루마리는 비브리온이고, 10장의 이 작은 두루마리는 비브라리디온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작은 두루마리는 어린 양의 두루마리와 완전히 다른 어떤 두루마리인가? ... 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두루마리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이라는 표현은 온 세상, 즉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작은 두루마리는 세상과 불신자를 향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이 작은 두루마리는 어린양의 두루마리와 그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 책은 성격이나 본질은 동일하고, 다만 분량이나 정도가 차이가 있는 그런 두 책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어린 양의 두루마리를 닮은 작은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주어, 요한이 그것으로 온 세상을 향해 사역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그 작은 두루마리를 주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 작은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그 두루마리의 내용과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이 그것을 먹자 그것은 요한의 입에서 꿀 같이 달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좋은 것이죠. “주의 말씀은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연상됩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가 요한의 배에 내려가자 그것은 쓰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네, 이것은 이 두루마리가 세상을 향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는 요한과 믿는 자들에겐 달지만, 교회를 박해하고 싫어하는 세상과 불신자에겐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 두루마리는 이중적인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작은 두루마리를 먹었고 신적 천사는 요한에게 다시 예언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 작은 두루마리가 5장의 두루마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 예언의 내용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세상을 향해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말하는 사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은 요한만의 사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밝혀집니다. 이어지는 11장 말씀에서 이것은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사명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네, 요한이 받은 사명은 곧 우리와 교회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의 우리와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안으로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 밖으로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화의 공동체가 되고 복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두 사명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 복음을 잘 전하고 전도를 열심히 해도 안으로 성화의 공동체를 이루진 못하면, 그것도 실패입니다. 안으로 잘 모이고 신앙을 잘 지켜도 밖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에 무관심하면, 그것도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두 사명을 균형있게 잘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마지막 때에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예언하라는 말씀은 세상을 향해 복음과 구원의 의미를 다시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그저 눈으로 보이는 땅과 하늘을 전부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땅과 하늘을 넘어 우주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주 공간에 설치된 제임스 웹 망원경은 이전의 허블망원경보다 100배 선명한 눈으로 우주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이제 신이 없어도 자연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인정하고 신앙을 인정했죠. 그러나 종말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지금 사람들은 불과 한 세대 만에 그런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않고 싫어하고 낡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세상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듣지 않고 우리도 그것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단지 결과를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입니다. 그들이 끝내 복음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많은 사람이 듣지 않는 마지막 때이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캄캄한 골짜기 불 밝힌 작은 오두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불을 밝히고 있으면,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요전도와 관계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계속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꾸준히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는 전도를 받는 사람에게도 역사하시고,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런 성령님의 귀한 역사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의 길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음과 심정으로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예언을 통하여 크신 일을 행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