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 비유와 예복
마 22:1~14
2022.03.20.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이제 세 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렇게 시작하는 이 비유는 일명 ‘혼인 잔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일명 ‘큰 잔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런데 이 누가복음 비유는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이나 장소나 대상이 마태복음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으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잔치도 혼인 잔치가 아니고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의 내용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 두 비유를 별개로 봅니다. 별개의 상황에서 별개로 하신 비유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태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는 마태복음만 말하는 비유이고, 마태복음만 말한다는 사실은 여기에 마태복음만의 특별한 강조점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무엇일까요? 네, 이 비유는 3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임금의 초청과 사람들의 거절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사람들의 초청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예복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오늘 비유의 이 3가지 강조점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과 의미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 비유의 강조점은 초청과 거절에 있습니다.
임금의 초청이란 중요한 초청이죠. 더구나 이 초청은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 초청입니다. 2018년에 인도의 한 세계적인 부호의 딸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유명인사들이 대거 초청되어 참석했습니다. 그 결혼식 축하공연의 가수는 미국의 팝가수 비욘세였고, 우리나라에선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참석했습니다. 결혼식의 비용은 1,000억원이 훨씬 넘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성대한 자리에 초청될 수 있다면, 아마 누구나 초청되길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되는 이 초청은 얼마나 더 귀한 초청일까요? 왕은 모든 준비를 하고 두 번이나 종을 보내 매우 정중하게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청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비유를 들으면,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이상한 부분이 바로 비유의 핵심입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지만, 사실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진실입니다.
우리는 왕의 초청과 사람들의 거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이고 종들은 선지자들입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 즉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유대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초청했지만, 그들은 계속 거절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일에 바빴습니다. 성전과 율법으로 인간적인 종교 체제를 만들고 서로 영광을 주고 받고 거기에 자기들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초청과 그들의 거절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세 비유가 완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두 아들 비유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두 번째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혼인 잔치 비유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같은 의미를 삼중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무너지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사역 중 하나는 이렇게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자기 품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거절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을 처음부터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실패와 좌절을 겪고 나중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보다, 처음부터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아래 잘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너희는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이와 같은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늘 하나님께 나아오고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두 번째, 이 비유의 강조점은 새로운 사람들의 초청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물처럼 흐르다가 어떤 곳에서 막히고 거절되면 그 방향을 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가지와 뿌리를 만들어 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롬9:6~7)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흘러갔고,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12지파로, 12지파에서 유다지파로, 유다지파에서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신실하게 자기 백성과 공동체를 이 땅에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반응과 결단과 깊은 관련을 갖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였을 때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족하고 못난 내게로 흘러오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거절하면 흘러가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면 구원해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끝내 거절하면 거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옛날 성전을 떠나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떠나고 새로운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그분의 초청을 감사히 받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이 비유의 강조점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예복에 있습니다.
이 비유의 세 번째 강조점은 사실 예수님 당시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향한 비유라면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조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그런데 이 비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새로운 사람들을 향한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예복에 대한 것입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새로운 사람들을 향한 이런 내용이 왜 혼인 잔치 비유 안에 있을까요?
네, 이 내용은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 상황과 신앙 상황이 개입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예복에 대한 말씀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태 당시 예수님을 새롭게 믿고 있는 교회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일차적으로 마태 당시 교회를 위한 복음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많은 성경이 대체로 이렇게 쓰였습니다. 한 본문 안에 두 개의 다른 시간과 상황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야고보서 말씀도 야고보 생전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보존되어 오다가 그분의 말씀이 필요한 시기가 되어 야고보서로 기록된 것이죠.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선지자가 말씀을 선포하던 때의 시간과 상황이 있고, 그 후 그 선지자의 말씀이 기록되던 때의 시간과 상황도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 비유는 마태복음만의 특별한 비유이고, 그런 점에서 이 비유 안에는 마태복음이 말하는 특별한 내용이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강조점이 바로 마태복음이 말하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이 예복에 대한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마태복음만 예복을 말씀하고 있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 당시 교회는 이 말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이방인 선교와 기독교 가르침에 큰 공헌을 한 사도바울 이후 시대입니다. 사도바울은 정말 신실한 사도이고, 기독교의 믿음을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독립시킨 분이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의 가르침 가운데 믿음의 의는 많은 오해를 낳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런 오해를 낳고 신앙의 방종을 낳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 일부가 방언에 대해 오해를 했죠.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지나치게 크게 생각해서 그들은 사도바울의 지도도 받을 필요도 없고 우린 이미 구원 받았고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수많은 문제의 중심에는 방언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신앙의 방종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사도바울의 믿음의 의도 당시 교회 일부와 신자들에게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우린 이미 다 구원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그런 뜻이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이죠. 그래서 당시 여러 교회들에 믿음과 행위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지금 그것을 바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쓰인 야고보서도 그것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초청 받아 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미래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맞보는 교회에 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예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성도의 선한 삶과 행실입니다. 회개하고 변화되어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은 후 그것을 따르고 본받는 삶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공개적으로 입으로 시인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대한 일부 설교들 중에 이 예복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변화된 삶과 행실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를테면 칭의의 예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와 해석은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갑자기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예복을 준비할 수 있었겠나? 그리고 이 예복은 왕이 주는 것이고, 곧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복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제가 이번 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잠시 인터넷으로 설교들을 검색해보니... 예복의 의미를 성도의 올바른 삶과 행실이라고 하는 설교가 물론 훨씬 많지만, 그러나 몇몇 설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예복은 왕이 주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는 해석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그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우리의 변화된 삶과 행실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과 행실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는 말씀은 사실 우리를 편안하게 합니다. 그렇게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너무 편안하고 쉽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초대교회 당시 믿음과 행위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혼란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고, 칼빈의 가르침을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조금 부담이 되고 어렵더라도, 이 예복의 의미를 우리의 선하고 올바른 삶과 행실이라고 선명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태복음의 강조점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오늘 혼인 잔치 비유에서는 예복으로 말씀하고 있고, 열처녀 비유에서는 기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마태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열매는 예복이고 기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예복에 대한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날의 미래에는 진정한 혼인 잔치가 하늘에서 열립니다. 바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19:7~8)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답고, 어린양의 신부다운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한 세상을 살면서 자기를 실현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또 뜻이 있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보다 좋은 세상과 사회를 만드는 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실한 삶을 살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예쁜 자녀를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날에 홀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 주님을 만날 때,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예복입니다. 나는 준비된 예복을 입었는가, 나는 준비된 기름을 가졌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뜻깊은 많은 일을 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도, 개인적으로 그것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복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는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여러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복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냐? 그것이 그렇게 힘들고 부담스럽고 안 되는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5~8)
여러분, 성화에 대해 어떤 편견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성화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완전한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과 성실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작은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면 됩니다.
거짓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때가 묻을 수 있습니다. 나의 연약과 부족으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곳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깨닫고 그런 상황과 싸우고 죄와 싸우고 우리 자신과 싸우며 의롭고 바르게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싸움과 노력과 성장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화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 자신과 죄와 세상 속에 갇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싸우고 노력하고 전진하고... 그런 최선을 다하고 변화를 꿈꾸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연스런 결과이고, 동시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성화를 이루어가는 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의 예복은 준비되고 기름도 준비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날에 눈을 감을 때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다 예복을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는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