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 21:18~22
2022.03.06.
저는 모태신앙이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교회가 재미있고 친구들이 있어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중고등학교때는 목사님의 설교가 들리기 시작하고 신앙이 자라면서 또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생 때 가방에 성경책을 넣고 다니면서, 매일 조금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성경을 읽을 때의 느낌은 뭔지 모르게 편안하고 시편 말씀처럼 영의 양식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씩 이해하기 어렵거나 곤란한 말씀을 만나면, 참 힘들었죠. 교회에서 목사님에게 자꾸 물어보기도 그렇고 좋은 주석이나 책도 잘 모르고... 그래서 혼자 조금 생각하다가 그냥 넘어갈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본문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에 제가 이 말씀을 읽고 든 의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왜 뜬금없이 길가에 있는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마르게 하셨는가?’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을 보면 그때는 무화과가 열리는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후에 제자들이 “어찌하여 이 나무가 말랐습니까?” 라고 질문하자, 엉뚱하게도 믿음을 이야기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절대적인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지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믿음의 중요성과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시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제게 여러모로 어려운 말씀으로 기억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 무화과나무가 뭘 잘못한 건지?, 예수님은 갑자기 왜 그렇게 과격하신지?, 예수님의 대답은 적절한 대답인지?...
물론 지금은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도 알고, 그렇게 행동하시고 대답하신 배경과 의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오늘 본문의 이와 같은 몇 가지 의문을 살펴보고, 이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사건은 당연히 즉흥적인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날 시장하신 나머지 예민하셔서 즉흥적으로 그렇게 하실 분도 아니고, 또 그런 사건이라면 마태나 마가나 기록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마지막 일주일이 잘 계획되고 준비된 시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최후의 시간에 완성하실 많은 일들을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께서 그 중요한 시간에 길 가의 한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공연히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실 리가 없죠.
우리 삶의 작은 일에도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면, 마태복음은 21장 처음부터 예수님의 파격적이고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상징적인 모습과 행동들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 성전 정화를 하신 것. 그러므로 우리는 이어지는 이 무화과나무 사건 역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근거는 사실 마가복음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최초의 복음서로서 이 사건을 성전정화 사건과 연결된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 성전정화를 하시고 이튿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확인합니다. 즉 무화과나무, 성전정화, 무화과나무... 네, 마가는 그렇게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는 방식을 샌드위치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두 내용이 서로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는 성전의 모습을 무화과나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런 마가복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마태는 마가와 달리 그 내용을 간단히 기록하죠. 그것은 마태의 시기에는 마가의 시기와 달리 성전과 무화과나무의 연관성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을 참고하면, 이 무화과나무 사건의 의미와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전을 염두에 두시고 그런 예언자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즉흥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신 것도 아니고, 그런 후에 엉뚱하게 믿음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말씀하신 이유는 보이는 성전이 사라진 시대에 이제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동안 성전은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이 없는 시대를 상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성전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전이 없는 시대를 염두에 두고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도 마가복음이 이미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이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나이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선 왜 말씀해주시지 않았을까요? ‘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은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왜 말씀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네, 그것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성전에서 그 내용을 곧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대답이 바로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그 비유는 포도원 주인에게 열매를 바치기를 거절한 농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를 성전에 있던 백성들도 듣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들었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상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우리는 어떤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야 할까요?
네, 바로 열매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절대적으로 열매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음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전도 열매가 없음으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열매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말씀드리는 내용이지만, 일부 교회들이 안타깝게도 구원에 있어 균형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는 우리의 정직한 반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천로역정의 그 미스터 크리스천처럼 세상에서 나와서 구원의 길을 걷고, 열매를 맺고, 변화되고,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힘쓰고 애쓰고 우리 자신을 비우고 노력해야 하기에 어쩐지 인기가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이런 우리의 문제를 오래 전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선한 삶의 예언적 상징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들에게는 그런 무화과 열매가 없었습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부지런히 악을 행하고,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찔레 울타리 보다 더했습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그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구원과 메시아 탄생과 야곱의 남은 자를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열매에 대해 깊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15:1~2)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마태복음의 강조점 역시 열매입니다. 마태복음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마태복음이 열매와 행위를 말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의 신학입니다.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열 처녀 비유... 그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그 비유의 초점은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입니다. 기름의 의미가 무엇인가...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과 강조점 속에 그 기름의 의미는 바로 우리의 열매와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른 채 바쁘기만 한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은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자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이번 주 넥슨의 창업자 김정주씨가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많은 것을 이룬 분이고 많은 것을 가진 분이지만 오랜 시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부자라고 하나님을 더 만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하나님을 더 만나는 것도 아니고 못 배웠다고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오늘 이 말씀을 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첫째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분의 믿음, 그분의 사랑, 그분의 기도, 그분의 정의, 그분의 신실함...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수록 그분의 인격과 성품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변하지 않는 내 고유의 성격이 있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만 알던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알고, 누군가를 용서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더 많이 더 높이 가려는 생각도 그만두고, 물질문명의 이 바벨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어느덧 우리 안에 악하고 독하고 이기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여전히 자기 중심과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 과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태어난 자연적 본성 그대로 있는 사람인지... 우리 마음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아무쪼록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님의 인격과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삶의 열매입니다.
유학을 숭상하던 예전 우리 선조들의 삶을 보면, 그때는 선비된 자의 삶의 목적은 입신양명이었습니다. 공부를 해서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고 이름을 떨치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죠. 그것이 최고의 효이자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 세계관을 지금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성공하고 승진하고 높은 자리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앉아있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고 말씀하시고 또 친히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귓등으로 듣고 다 성공을 기도하고 비전을 꿈꾸고 높은 자리를 축하합니다. “우리 자녀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자랑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비전이나 꿈이나 입신양명의 삶을 살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고 열매를 보십니다. 높은 삶을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죠. 평범하게 살 수도 있고 좀 어렵게 살 수도 있습니다. 뭘 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고 자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열매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았느냐, 그 자리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지금 우리 삶이 여러모로 많이 어려운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 속에 처해 있지만, 그 어려움을 참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용기있게 살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열매입니다. 주저 앉지 않는 것, 잘못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열매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저의 아버지의 외도로 혼자 저와 누나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때 저의 어머니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그때 여전도사로 헌신하며 살까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어머니를 상담해주셨던 목사님이 그렇게 하지 말고 자녀들을 잘 키우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셔서 그 생각을 접으셨다고 합니다. 그후 어머니는 비록 자기 꿈과 삶은 없지만, 저와 누나들을 키우고 바라보며 최선으로 사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 삶을 하나님께서 귀한 열매로 인정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둡고 부패하고 거짓된 곳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기 무척 어렵죠. 그러나 내가 그 속에서 캄캄한 골짜기 불밝힌 작은 오두막처럼 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 어둔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수십년 예수님을 믿어도, 다 자기를 위한 열매 밖에 없는 신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어떤 열매를 맺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분은 이제 주님 앞에 보여드릴 자신의 삶이 없겠죠. 그것은 자신의 인생의 숙제를 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다 자기 일을 직고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보여드릴 귀한 삶의 열매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네, 이것 역시 우리의 중요한 사명이죠.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를 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전도가 어려운 시대이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 애를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저는 길을 걸어가는데, 양복을 입은 어떤 어르신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제게 전도지 한 장을 주셨습니다. 받고 금방 지나치게 되었지만, 그 어르신의 모습이 어쩐지 여운이 계속 남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는 여러분들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그분들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문을 언제나 열어 놓은 귀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는 헌신예배입니다. 그런데 저는 열매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이 곧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인격과 삶과 복음의 열매를 맺는데 늘 헌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