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강도의 소굴

믿음찬교회 0 223 2022.03.01 18:42
강도의 소굴
마 21:12~17
2022.02.27.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소위 성전정화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첫날에 곧장 성전에 들어가셔서 행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예루살렘 입성 첫째 날이 아니라 두 번째 날에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간에는 경우에 따라 사실에 있어 작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는 여러모로 오늘날과 달라서, 시계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사진도 없고, 사람들의 사고나 이해도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사실의 정확성 보다는 의미의 정확성이 더 중요했고, 따라서 글을 쓸 때도 그만큼 자유로웠다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첫날에 곧장 성전으로 가셔서 그 일을 행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 결과 성전사건은 나귀를 타신 겸손하고 평화로운 입성과 대조되는 매우 극적인 사건이 됩니다. 반면에 마가는 그 일을 두 번째 날에 행하신 것으로 기록하여, 그 성전사건을 예수님의 잘 준비되고 의도된 계획으로 나타냅니다.
이와 같은 마태의 의미와 마가의 의미는 모두 다 옳습니다. 그 성전정화 사건은 매우 극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잘 계획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경을 우리 이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해를 성경과 그 시대에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우리와 다른 시대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가와 마태의 이 두 말씀 중 어느 말씀이 더 사실적일까요? 네, 마가가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성전정화 사건은 두 번째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마지막 일주일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날인 일요일에 입성, 월요일에 성전정화, 화요일과 수요일과 목요일에 논쟁 및 강화, 목요일 밤에 마지막 만찬, 금요일 새벽에 체포,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달리심, 그리고 오후에 운명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일주일의 시간표를 이해하면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왜 이렇게 과격하게 성전을 정화하시는 걸까요?
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여러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스가랴서 마지막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14:21) 여기서 ‘가나안 사람’이란 단어는 ‘상인’ 또는 ‘장사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스가랴서는 여러모로 관련이 깊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 대로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말라기서 말씀도 이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3:1~2)
성전에 임하시는 언약의 사자는 금을 연단하는 불과 같이, 표백하는 잿물과 같이, 과격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이와 같은 구약성경을 단순히 따르고 성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그 행동은 성전의 종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나오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의 최후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궁극적으로 종말을 고해야 합니다. 성전의 시간은 이제 다 되었습니다. 성전은 사라지고 이제 성전을 대체할 새로운 신앙의 구심점과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의 구심점은 바로 예수님이고,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전을 바라보는 물리적인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대략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정화 사건은 이런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에,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는 이 성전사건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면서 하신 한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하나입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곳, 누구나 와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이것은 성전을 제사장의 관점이 아니라 백성들의 관점으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성전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의 그와 같은 본연의 모습이 완전히 실패한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 거룩한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11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려면, 예레미야 7:9~11을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의 한 부분인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 말씀을 성전 문에 서서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라고 했고,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예레미야서 말씀을 읽어보면, 예레미야와 예수님의 이 ‘도둑과 강도’는 말 그대로 ‘도둑과 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이 단순히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자들의 소굴이라는 말이 아니라, 평일에 하나님 앞에서 온갖 악을 행하면서 안식일에는 거룩한 모습으로 성전에 오는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평일에 하나님 앞에서 현저히 그릇되게 살지만, 그러나 안식일에는 성전에 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라고 믿고 고백하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도둑질한다는 점에서 ‘도둑과 강도들’이고, 성전은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고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용납하고 위로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을 바꾸어주고 제물을 팔면서 장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의인들의 처소가 아니라 각종 악을 행하는 ‘영적 도둑의 소굴’이고, 기도의 집이 아니라 영적인 장사를 하는 ‘장사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 성전의 비참한 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의미로 하신 이 말씀을 가벼이 듣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 교회와 신자를 향해서도 얼마든지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전이나 교회나 개인이나 한 나라의 역사나 물건이나 건물이나 ...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고 정상적이고 올바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때가 묻고 퇴색되고 타락하고 망가지게 됩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해서 무질서가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성전의 역사는 당시 무려 천년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아름다운 거룩한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너무도 벅찼습니다. 그런데 천년의 시간 속에 성전은 타락하고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장사의 집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지금 무려 이천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그 새로운 공동체는 초대교회를 거쳐 중세교회를 거쳐 종교개혁을 거쳐 개혁교회가 되고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졌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만 120년 정도됩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시작되자 마자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를 거치고 가난한 시절을 거치고 지금 부유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정도 많은 시간과 세월이라면,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교회에 바로 적용하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도 아마 너무나 많은 신앙의 왜곡과 훼손과 문제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문제들을 일일이 다 살피지 못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2가지 내용만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적인 도둑들이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도둑질하는 것인가? 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을 도둑질할 때가 많죠.
나의 악한 이기적인 삶을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 하나만 가지고 대속 교리라는 교리 하나만 가지고 그 깃발을 흔들며 구원 받으려고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많은 말씀과 뜻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만 듣고 내가 필요한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바라면 나는 영적인 도둑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때 성전 문에 서서 유대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우리가 이 말씀처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구원을 바라면, 우리는 영적인 도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당연시하고 받기만 하고 이용만 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분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어려움과 희생은 싫어합니다.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영적인 도둑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복 받을 일을 하고 복 받을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간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이 왜 그렇게 축복해주었을까요? 그것은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사역과 개인적인 필요를 많이 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 받을 삶을 살지 않고 행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움직여서 내가 원하는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나는 우상숭배자이고 영적인 도둑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영적인 도둑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영적인 장사를 하는 장사의 집으로 만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의 공동체이고, 동시에 성화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을 통해 구원의 길을 걸으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손쉬운 위로와 손쉬운 구원을 말하며 성전처럼 커지고 부유해지기만 한다면, 교회는 상인과 장사꾼들의 집, 장사의 집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단지 그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게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성전 당국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과 성전 체제를 유지하고 종교 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해석하고 시행했지만, 그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성전과 율법을 더 중시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성전과 율법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성전과 율법을 잘 유지했죠.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돈이고 지위이고 결국 장사였기 때문입니다.
네, 그것은 영적인 장사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과 위로와 평안과 축복을 주면서 사람들의 돈과 제물과 헌신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오고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래서 변화되지 않고, 그저 종교적 위로와 평안과 축복을 받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성화의 공동체라는 목적을 상실하고 영적인 공동체라는 기능을 상실한 채, 신자들에게 종교적 만족과 믿음과 위로만 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고 파이팅 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성경 한 권 시원하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영적인 삶은 자라지 못하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지만 오직 구원의 확신만은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교회와 목회자는 계속 커지고 부유해집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일정한 목회 성공 공식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먼저 능력을 받고, 목사의 권위를 높이고, 다 구원 받는다 하고, 축복을 약속하고, 훈련을 시키고, 헌신을 시키고, 전도와 선교에 힘쓰고, 교회 건축을 하고... 그런데 그 어디에도 변화된 영적인 삶과 성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세우지만 그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네, 교회는 그 옛날 성전처럼 영적인 장사를 하고 있고 목회자는 삯을 받는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말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는 매일 영적인 성장을 하고 있고 새로워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목사인가?...’ 썩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가장 먼저 제 자신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도 교회의 목적을 바르게 아셔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겉으로 커지고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워지고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져야 합니다. 몇 사람이 모이더라도 그런 영적인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는 믿음을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고, 도둑의 소굴이 아니라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영적인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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