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기도회 (2022.02.18)
계 7:4~8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144,000을 구성하고 있는 12지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은 144,000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씩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여기서 언급하는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한 말씀의 구약 배경은 에스겔서 48장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서 48장엔 이스라엘 12지파의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이 있고, 또 거기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에스겔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에스겔서 말씀과 같이 이 땅의 최후 종말에 이스라엘 12지파가 회복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요한이 말씀하는 이 회복될 이스라엘 12지파는 실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부 요한계시록 주석가 중에는 이 12지파를 실제 이스라엘 12지파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종말에 이스라엘 민족의 대대적인 회심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분들은 그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는 구약의 예언(예를 들어 에스겔 48장)과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롬 11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실제 이스라엘 12지파로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로서도 북이스라엘 10지파가 회복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경에 앗수르에 멸망했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땅에도 여러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이런 앗수르의 혼합정책으로 인해 민족의 정체성을 영영 잃고 말았습니다. 신앙도 없었기에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10지파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은 있습니다만, 그것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편 스가랴서 11장을 보면 그들에 대한 새로운 예언이 나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잡혀 죽을 양떼에 대한 말씀으로,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은총의 막대기와 연합의 막대기를 꺾어버리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그 연합의 막대기를 꺾는다는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합의 기대와 희망을 꺾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온전한 회복을 부정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몇 세대 앞서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이 주어졌지만, 이후 정반대의 예언이 스가랴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도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 회복은 영적인 차원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신자들을 새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이와 같은 말씀과 역사에 정통한 요한이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요한이 이것을 모른 채, 실제 이스라엘 12지파가 회복된 144,000을 말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말씀하는 이 144,000의 12지파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144,000도 상징적인 의미이고, 144,000의 12지파도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은 대다수 주석가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한편 이와 같은 사실은 요한이 에스겔서의 이스라엘 12지파 명단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에스겔서 48장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12지파는 그 명단이 다릅니다. 첫째, 유다 지파가 12지파의 맨 앞에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둘째, 단과 에브라임 지파가 제외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요한이 유다 지파를 맨 먼저 언급하는 이유에 대해선 쉽게 납득이 됩니다. 본래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래서 르우벤 지파가 12지파 명단의 처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신 유다 지파를 가장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미 5장에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단과 에브라임이 제외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 부분이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단과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우상숭배에 빠진 대표적인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단지파가 우상숭배에 빠진 사실은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은 부유했는데, 그는 자기 집에 한 신상을 두고 한 떠돌이 레위인을 그의 집의 개인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미가의 신상과 개인 제사장을 단지파가 강탈하여 자기 지파의 우상과 제사장으로 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말기에는 이렇게 이상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단지파는 강탈할만한 것이 아닌 것을 어리석게도 강탈해갔습니다.
그후 그렇게 그것을 가져간 단 지파의 단이라는 성읍은 북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맙니다. “(여로보암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왕상12:28~30)
한편, 에브라임도 북이스라엘 10지파 가운데 우상숭배를 주도한 지파였습니다. 그 내용은 호세아서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호4:17~18),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호5:9) 따라서 이와 같은 예언을 바탕으로 요한은 에브라임을 144,000에서 제외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에스겔 48장의 예언을 통해 최후의 종말에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을 바라보되, 그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두 지파를 제외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144,000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네, 우리는 이 144,000을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대개 우리는 이 144,000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는 이것을 단순히 구원받은 백성의 상징수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다 구원받는 것이고, 그래서 믿는 자는 이 144,000에 다 들어간다고 믿습니다.
이에 비해 이단들은 144,000을 실제수로 강조하면서 이 안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144,000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 합니다. 교주가 가르치는 대로 모든 것을 바치고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러나 두 지파가 제외된 144,000의 참된 의미는 이 양쪽 어느 것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온전한 백성에 합당하지 않은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를 제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12지파의 회복에 대한 구약 예언이 있어도, 그것은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성취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들은 제외되는 것이죠. 요한은 이러한 영적 사실을 계2~3장의 일곱 교회 말씀에서 이미 잘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교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말씀하시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시고, 이기는 자의 받을 최종적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은 단순한 이스라엘 12지파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당치 않은 자들은 이스라엘 지파나 신약의 교회나 다 제외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합당치 않다는 것은 겉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제로는 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마지막 때는 참 신자와 가짜 신자를 구별하는 큰 시험의 시기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각종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돈이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하고, 정의보다 죄와 불법과 비정상이 성행하고, 하나님 말씀에 어둡고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양심이 마비되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을 잃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만 하고, 믿는다 하나 하나님 없이 실제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이 144,000에 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요한이 말하는 이 144,000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144,000에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거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삶을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일을 하며 살 수도 있고 작은 일을 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비전이 클 수도 있고 소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44,000이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