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곧 보게 되어

믿음찬교회 0 120 2022.01.25 16:06
곧 보게 되어
마 20:29~34
2022.01.23.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 대한 재교육 다섯 번째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전 제자들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어떤 준비가 되어야 할까요?
네, 하나님 나라의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당장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해 준비되어 있어야 하죠.
그러나 사실 제자들이 그것을 위해 실제로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오직 예수님이 홀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흔들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보고 품고 믿고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태복음이 말씀한 제자들의 재교육 내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이해가 말씀에서 뜻으로 나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삶이 율법을 넘어 그분을 따를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믿음이 사랑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이 낮아져 종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눈이 놀랍게 뜰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온전히 준비되면, 제자들은 이제 십자가를 넘어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참된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은 복음서가 항상 중요하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첫 번째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첫 번째는 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마태복음이 두 번, 마가복음이 두 번, 누가복음이 한 번, 요한복음이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맹인 치유 사건은 세 복음서와 흐름이 조금 달라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생각할 때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두 맹인이 한 번은 갈릴리에서, 또 한 번은 여리고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 여리고에서 치유 받은 맹인 한 명은 바디매오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벳새다 맹인과 바디매오가 치유를 받습니다. 누가복음은 여리고의 한 맹인 즉 바디매오가 치유를 받습니다.
그래서 세 복음서의 맹인 치유 사건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맹인 바디매오를 세 복음서가 다 말하고 있고 여기에 추가로 마가복음이 벳새다 맹인을 말하고, 또 마태복음이 갈릴리 두 맹인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장의 갈릴리 두 맹인 사건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여러 사건과 기적이 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할 맹인 치유 사건은 단 두 개만 남습니다. 세 복음서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바디매오 사건과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벳새다 맹인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동일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건을 같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이 두 사건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신다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잠깐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복음서의 맹인 치유 사건이 복음서별로 모두 몇 개입니까? 그 중에서 중요한 사건 두 개는 무엇입니까? 그 두 개의 사건은 왜 중요합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20장의 맹인 치유 사건의 의미가 단순히 그들의 눈을 뜨게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이 본문을 보고 그런 묵상을 하여서 이렇게 설교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 묵상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태복음을 연속적으로 보면서 19장과 20장 말씀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제자들의 재교육 내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맹인 치유 사건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그것을 처음부터 말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전체를 3부로 나눌 수 있는데, 1부는 갈릴리에서, 2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3부는 예루살렘에서입니다. 그런데 1부 맨 마지막 사건이 벳새다 맹인 사건이고, 2부 맨 마지막 사건이 바디매오 사건입니다.
마가복음은 최초의 복음서로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우리들에게 말씀하는데, 그런 가운데 중요한 주제 하나가 바로 제자들의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몰이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룩을 이야기 하면 떡을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면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룩을 말씀하시자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낙담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그 말씀에 이어서 바로 벳새다 맹인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 맹인은 특이하게도 두 번에 나누어 고침을 받게 되죠. 예수님은 일부러 그렇게 두 번에 걸쳐 그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처음에 그 맹인은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안수하셨고,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벳새다 맹인은 제자들을 의미하고, 그래서 그 사건은 맹인이 그런 과정을 통해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눈을 뜨게 된다는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은 벳새다 맹인 사건을 단순한 맹인 치유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이 눈을 뜨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1부의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하고, 또 동일한 의미로 2부 마지막 사건을 바디매오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마가복음의 의미를 마태복음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역시 이 바디매오 사건을 예루살렘 입성을 앞 둔 마지막 사건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제자들이 눈을 뜬 것처럼 여러분들도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절대적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눈을 뜨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눈을 뜨게 됩니다. 공부에 눈을 뜨고, 일에 눈을 뜨고, 사랑에 눈을 뜨고, 자유에 눈을 뜨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눈을 뜨고 어떤 사람은 신앙에 눈을 뜨기도 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저희 집에 있는 우주는 몸은 어른이지만 아직 깨끗한 방과 정리 정돈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속 잔소리를 하지만 그때 뿐이고, 늘 어지럽고 복잡한 방에서 편안하게 생활합니다. 왜 그럴까요? 네, 아직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라고 철이 들면, 잘 정리하고 제대로 생활하겠죠. 
이렇게 단순한 생활에서부터 우리의 마음과 영적인 삶과 믿음까지 사실 원리는 같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눈을 떠야 해결됩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눈을 떠야 결국 해결됩니다.
저는 예전에 집에 대해 눈을 일찍 떴습니다. 내 집이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도 있고 성경에 땅에 대한 말씀도 있고 해서... 직장생활 하면서 제일 먼저 집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직장 선배들이 아파트 청약을 하길래 저도 같이 따라 청약을 했습니다. 두 명은 해운대로 가고, 두 명은 대연동으로 갔죠.
여러분들도 좋은 기회와 좋은 일에 늘 눈을 뜨시기를 바랍니다.
눈을 뜨는 방법은 다양하죠. 경험과 실패, 좋은 책과 가르침, 차분한 생각과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열린 마음도 필요하고 생각의 전환도 필요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는 귀한 능력인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실 때, 많은 것에 눈을 뜬 밝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닫히고 좁고 어두운 사람이 되지 마시고, 밝고 넓고 열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눈을 떠야 한다는 사실과 그 중요성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는 걸까요?
우리 생활과 삶에 대한 부분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생활과 삶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영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는 걸까요?
제가 한 때 유교 및 유학과 관련된 책을 조금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선 무엇을 말할까 궁금해서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논어 맹자 중용... 그 책들은 주로 삶의 철학을 말하고... 장자, 도덕경... 그 책들은 삶의 초월을 말하고 또 도를 말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말씀과 여러모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삶이나 죽음 자체 그리고 죽음 이후의 문제를 보다 깊이 고민한 것은 불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도 조금 읽어보았습니다. 불교는 무엇을 말하고, 석가모니는 무엇을 말하고, 우리에게 무엇을 보라고 하는 것일까?
불교가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결국 말하는 것을 쉽게 정리해 보니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사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집착을 끊고 해탈해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마음의 중요성, 또 자기가 부처라는 사실, 너 자신을 등불 삼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 모두가 찬란한 화엄의 세계, 생과 사는 따로 없고 하나라는 것, 초자연적인 실재는 없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라는 진리, 그래서 이 삶과 실재를 그대로 편안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고 법계라는 사실, 따라서 불교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진지한 학인에게 ‘밥은 먹었는가? 차 한잔 들게’ 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불교는 사람들에게 이런 깨달음과 가르침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우리가 참고하고 배워야 할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눈을 만지실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게 되는 걸까요? 예수님은 과연 우리가 무엇에 눈을 뜨기를 원하실까요?
저는 예전에 어떤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의를 매주 참석하여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해박한 성경지식으로 요한계시록 한 말씀 한 말씀을 아주 자세하게 말하며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개월 열심히 참석하다가 그만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매주 시간을 내서 열심히 참석했지만 그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이 무엇을 말하는지 속시원히 말씀해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강의를 몇 년이나 듣고 있던 다른 분도 저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유학이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 불교가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결국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교회는 그 결론을 말해주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에 눈을 뜨라고 하시는 걸까요? 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첫 일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은 동일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나라를 알아야 하고, 그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못 본 많은 사람은 도중에 다 돌아갔습니다.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고 병도 고치고 떡을 먹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못 본 사람은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현되고 있고 마침내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그것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막연하게 하나님을 보라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거기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면, 우리 신앙은 미신적인 옛 신앙을 못 벗어납니다. 그저 복을 받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오래전 신앙의 틀을 못 벗습니다. 사제들과 무당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바치라는 대로 바치는 수동적인 신앙을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면서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지 물으십니다. 이 세상과 이 땅만 바라보고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그 나라를 바라보고 거기에 맞추어 살 것인지...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만들고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 같이 진주를 발견한 상인 같이 하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 나라를 소유하고 그 나라의 삶을 지금부터 살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을 만지사 우리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제 자발적으로 그 삶을 추구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보여주신 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귀한 삶과 사역으로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래 전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불을 몰랐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어떤 현인이 그들에게 나타나 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과 불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 후 그 사람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현인을 그리워하며 매년 그 사람을 기념하는 날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그만 불을 피우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기념하는 날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알고 예배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또 무엇을 보라고 하셨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신자는 50점짜리 신자입니다. 막연한 신앙과 옛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신자는 100점짜리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구원 계획을 알고, 그것을 스스로 추구하여 마침내 그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9~1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사람은 누가복음 16:16 말씀처럼 과감하게 그 나라로 들어가는 파격적인 사람이 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도 침입하느니라.” 여기에 표현된 ‘침입한다’는 말씀...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눈을 떠 하나님의 나라를 밝히 보시고 그 하나님의 나라로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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