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믿음찬교회 0 370 2021.08.17 12:47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1:10~11
2021.08.13.

예수님은 이제 2장부터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실재했던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을 말하는데, 그 중간 지점 해안에 에베소가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머나가 있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버가모가 있습니다.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두아디라가 있고, 두아디라에서 또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사데가 있고, 사데에서 또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빌라델비아가 있고, 빌라델비아에서 또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라오디게아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다시 서쪽, 즉 바다 쪽으로 가면 에베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에베소에서 라오디게아까지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차례대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곱 교회 전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왜 일곱일까요? 예, 이 문제는 쉽습니다. 그것은 숫자 상징이죠. 일곱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모든 교회를 향해 말씀하는 의미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가 선택되었을까요? 다른 지역에도 교회가 많은데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예루살렘 및 유대 지역의 교회들은 쇠퇴하고, 이에 비해 소아시아 지역이 교회 성장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로마와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이교적인 우상숭배의 문화 속에 황제숭배가 강하게 대두되었죠. 그러므로 그곳은 이른바 영적 싸움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일곱 교회는 혹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실제 교회로 보기보다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곱 교회란 교회 시대의 일곱 시기를 상징한다는 것이죠. 세대주의 해석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교회사 2,000년을 일곱 시기로 나누어 이를테면 에베소 교회는 초대 교회를 상징하고, 사데 교회는 중세 교회를 상징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역사적으로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해석이라 할 수 없는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한편, 신천지는 일곱 교회를 일곱 목자를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그것은 목자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를 일곱 목자로 해석하는 그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신천지 설립의 정당성 및 이만희 신격화를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재열의 장막성전의 칠 천사 중 한 명을 따른 사람이 이만희씨죠. 그래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곱 교회 자체를 어떤 상징으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제 일곱 교회 전체 말씀의 순서와 구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곱 교회가 지리적으로 에베소 교회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위치 순서로 이 말씀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체를 잘 살펴보면, 순서와 구조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순서가 2번째와 6번째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4번째 두아디아 교회에 대한 말씀 중심에 그 교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닌 모든 교회를 위한 말씀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말씀의 위치는 전체 말씀의 한 가운데입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2:23) 이 말씀은 각 편지 말미에 있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를 제외하면, 모든 교회를 향한 유일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그래서 이런 단서를 주목하면, 이 전체 말씀은 교차대구 구조로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일곱 교회는 abcccb′a′라는 교차대구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에 의하면 일곱 교회는 3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에베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한 그룹이 되고,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한 그룹이 되고,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 교회가 한 그룹이 됩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같은 그룹으로 분류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다 쳐도,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 속에 단 한 가지의 책망만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두 교회가 어떻게 한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졌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었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모두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네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이었고, 라오디게아를 향한 경고도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 교회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이 세 교회 역시 심각한 문제를 가진 교회들이죠. 그러나 적어도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에베소 및 라오디게아 교회와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세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도 다릅니다. 그것은 그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향한 것이지, 그 교회 전체를 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 교회는 적어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문제를 가진 교회로 함께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세 교회를 좀 더 구분한다면, 버가모 교회가 그나마 좀 양호한 상태이고, 그 다음은 두아디라 교회이고, 최악은 사데 교회입니다. 그래도 사데 교회는 죽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에베소 교회 및 라오디게아 교회와 다르게 분류됩니다. 
마지막으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한 그룹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악의 교회가 처음과 끝에 위치하고, 심각한 교회가 중간에 위치하고, 좋은 교회가 그 두 그룹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구조 및 순서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무척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대체로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만, 다만 한 가지가 부족해서 책망을 받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본질적인 차원에 큰 문제가 발생한 교회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우리 역시 교회의 본질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 사랑, 성화,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입니다.
둘째, 심각한 문제를 가진 세 교회가 전체 구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그 교회들의 문제가 당시 교회들의 주된 문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적어도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각한 문제는 바로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마지막 때에 잘못된 가르침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각 교회를 향한 편지 결론 부분에 있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은 이것이 각 교회의 편지 결론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런데 이것은 결코 상투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9~12) 예수님의 이 말씀은 듣는 자를 구별하고 차별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말씀입니다.
선하신 예수님께서 왜 듣는 자를 차별하실까요? 요한계시록도 왜 듣는 자를 차별할까요?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의 기원은 이사야서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6:9~10) 왜 하나님은 그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돌아선 강퍅한 사람들은 어떤 경고에도 듣지 않습니다. 그 경고가 예언이든 묵시이든 비유이든 상징이든 그들은 이미 마음이 굳어져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소수의 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적어도 갈등하거나 괴로워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의 심령은 미약하나마 살아있고, 회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충격요법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시대 속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과 양심이 깨어있고 믿음이 살아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나머지는 다 세상과 타협하고 주류에 동화되고 넓은 길로 갑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물질과 축복을 정당화하고 세습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비록 주류는 그렇게 흘러가더라도 살아있는 참된 신자와 갈등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어 듣는 참된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면 정신이 될 수 있고, 정신이 되면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실천까지 가야 말씀을 온전히 들은 사람이 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제가 이 마지막 때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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