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믿음찬교회 0 93 2023.05.14 11:48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12
2023.05.14.

깨어진 공동체를 보면서, 남은 신자들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이제 오늘 본문에서 신약성경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만약 성경 말씀에 감히 순위를 매긴다면, 오늘 말씀은 신약성경 안에서 다섯 손가락 혹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를 놓고 생각해도, 결코 그 순위가 뒤로 밀리지 않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 중 우리가 아는 가장 익숙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일 것입니다. 13절로 구성된 그 말씀 안에는 사랑의 정의, 사랑의 우선성, 사랑의 영원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교과서와 같은 말씀이죠.
그런데 그와 같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과 오늘 말씀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오늘 말씀이 더 풍부하고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는 사랑의 정의, 사랑의 기원, 하나님의 본질, 신앙의 본질, 신앙의 핵심 윤리, 하나님을 보는 것, 사랑의 완성 등... 많은 내용들이 이 짧은 6절 안에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내용을 우리가 살펴보려면, 한 편의 설교가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중요한 내용을 이미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은 본문을 한 구절씩 간단히 살펴보면서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깨어진 공동체를 보면서, 남은 신자들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혹 어떤 분은 이 아름다운 말씀을 읽고... 그저 좋고 편한 설교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언자들의 예언이 그런 것처럼,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멋진 책상에 앉아 좋은 차를 마시며 편안하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공동체와 남은 신자들과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눈물어린 한 말씀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고, 신앙도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도 없고, 우리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교회는 몰락하고, 거짓은 득세하고, 빛은 꺼집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여기에 사랑만 있다면, 공동체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보고, 미래를 보고,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오늘 말씀을 집에 액자나 그림으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의 이와 같은 배경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저 아름답고 좋은 말씀이 아니라, 눈물 어린 말씀이라고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이 말씀은 사랑의 기원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사랑의 기원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당연히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기원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상과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의 오만함 같은 말씀으로 보입니다. “세상에도 사랑이 있고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는데, 왜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도 사랑을 아는데 그러면 우리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네, 그들의 이와 같은 항변이 언뜻 맞아 보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사랑의 노래와 사랑의 시가 많고, 얼마나 남녀 간의 사랑이 풍부하고, 얼마나 부모의 사랑이 애틋합니까?
그런 점에서 사랑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는 이 말씀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어려운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우리 눈에 비늘이 벗겨지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랑의 노래와 사랑의 시는 물론 아름답고 순수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아름답고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도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안타깝게도 영원한 사랑을 주기 어렵고 받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을 가졌고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고 또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랑도 충분히 아름답고 진실할 수 있지만, 그것은 원형이 아니라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는 그림자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원형이라고 오해하면, 우리는 사랑에 있어 실패와 상실과 방황 등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의 원형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절에서 사랑의 기원을 말씀한 사도 요한은 이제 8절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네, 그렇습니다. 사랑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사랑 하나로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 중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한 이 사실이, 지금 세상 사람에겐 거짓말 같은 사실로 많이 오해받고 있습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신이냐? 동성애자를 미워하는 신이 어떻게 사랑의 신이냐?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잔인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신이냐?...’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의 오해에 맞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믿어야 합니다. 죄도 없고 심판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는 세상이 사랑의 세상일까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정한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언제나 믿어야 합니다.

9절과 10절은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도 요한은 세상의 사랑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9절과 10절에서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구체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추상적으로 사랑하거나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직접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온 우주와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힘과 능력을 가지시고 모든 법칙과 원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도대체 왜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의 죽음을 결정하신 걸까요?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한 모든 신화에 그런 신은 없습니다. 신화의 신들은 신들의 세계에 사는 존재일 뿐, 사람을 위하고 생각하는 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와 같은 기이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구체적인 사랑을 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얼마나 자기희생적인가... 우리는 이 기준을 가지고 내가 하는 사랑에 점수를 매겨보아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1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도 1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점점 사랑의 점수를 높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못하면 교회를 욕하고, 기독교가 잘못하면 기독교를 욕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함부로 말하거나 마음대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제가 요즘 2007년에 나온 철 지난 책인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이란 책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비롯한 인격적인 신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옹호한 대표적인 책이죠. 원래의 제목은 The God Delusion 즉 ‘신이라는 망상’이라는 제목입니다.
책을 본 제 느낌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와 종교를 너무 싫어하는 한 사람이 마음껏 자기 생각을 말한 책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철저히 오늘의 시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비슷한 베스트셀러인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런 책을 잃고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누구라도 그런 가벼운 책을 읽고 성경을 의심하거나 지적인 우월감이나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11절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핵심 윤리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리스도인의 핵심 윤리는 ‘사랑’입니다. 비록 여기서 사도 요한은 그 특별한 상황 속에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만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내부적으로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 속에서 사랑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독하고 이기적이고 때로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가는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사랑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 누군가 쉼을 얻고 편안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여러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서 한 가지 느낌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외국 특히 미국의 신자들을 만나면 뭔가 넓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이나 강사님들을 만나면 뭔가 어렵고 불편하고 자기 과시적인 위화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뭔가 전체적으로 신앙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까요, 신앙의 색깔이 다르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그러나 뭔가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이 어느 정도 맞다면... 그렇다면 외국의 그리스도인과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왜 다를까요? 저는 그 이유도 나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고 기도를 많이 하고 능력 받고 은사 받고 성전을 크게 짓고 큰일을 하고... 우리 한국의 신앙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만, 사랑의 실천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사랑의 성숙함이나 근본성을 추구하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똑같은 성경 말씀을 보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우리는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는 성경 말씀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마지막 12절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네, 지금 사도 요한은 매우 특별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네,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거의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매우 특별한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로 보면, 하나님을 보았거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와 관련 여기서 잠깐 요한복음 14장의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의 말을 에둘러 피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죠.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나타내실 때,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과 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빌립에게 그 말씀 이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신실히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말을 신실히 지키는 사람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하여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키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심령과 삶과 가정과 교회에 그분의 임재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빌립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최선의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요한이 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12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보시는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은사주의의 잘못된 오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성령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을 보고자 합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병고침을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사주의를 추구하시는 분들은 신앙의 최고의 자리에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두고 열심히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의 그와 같은 오해를 바로잡아줍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는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보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여 아름다운 하나가 되고, 우리 가정이 서로 사랑하여 아름다운 하나가 되고, 그러면 그런 사랑의 아름다운 자리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 오시옵소서’ 백일기도 쌓지 않아도, ‘성령님 오시옵소서’ 철야기도 하지 않아도, 비록 우리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해도,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서 오시게 됩니다. 거창한 의식을 할 필요가 없고, 거창한 집회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지도자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분의 사랑도 온전히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것은 현실 속에서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우리의 사랑을 이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왼뺨을 돌려대면 왼뺨도 마저 때리는 악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지혜와 현명함과 좋은 방법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고 우리의 고민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사랑이라는 원리와 원칙 자체엔 아무런 우리의 고민이 필요 없습니다. 반드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은총이,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언제나 가득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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