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믿음찬교회 0 131 2023.03.14 17:00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2~17
2023.03.12.

사도 요한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사귐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그런 초대장 같고 초청장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초청에 응하려면, 그 초청장에 적힌 몇 가지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초청하는 이 초청이 어떤 초청인지 알고 따라가야 하겠죠.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은 빛이시니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그분과 함께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보혜사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그분의 계명 중에서도 옛 계명이자 새 계명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이고 사랑의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은 우리가 사도 요한의 네 번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자신의 공동체 사람들을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하면서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연령에 따른 구분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성숙에 따른 영적인 구분으로 보여집니다. 대체로 나이와 믿음은 비례하고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각각 그들에게 쓰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이라”
네, 우리는 사도 요한의 이와 같은 힘 있는 말씀에 절로 아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3가지 중요한 내용을 각각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 용서입니다.
“너희 죄가 사함을 받았다...”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기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를 받고 새생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죄는 그때 한 번에 다 해결되고, 다 용서받았는가?
그래서 이 말씀은 1:9 말씀과 함께 고백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를 과거에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 용서 받은 삶을 오늘의 우리 죄를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죄 용서는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 용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죄 용서가 한 번에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의 용서가 오늘의 용서로 이어지고, 오늘의 용서는 미래의 완전한 용서로 완성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최초의 그 기초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 어린 자녀들에게 죄 용서의 확신에 대해 말씀하며, 그래서 너희에게 쓰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 용서를 확신하시고, 오늘의 죄를 고백하며 미래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두 번째로 말씀하는 내용은 “그분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을 특별히 공동체 가운데 있는 아비들... 즉 신앙으로나 연령으로나 어른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누구일까요? 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는 1:1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말씀 14절을 보아도,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다고 말씀하고 이어서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각각 달리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두 말씀에서 말하는 분이 각각 다른 분이 아니라면, 그 말씀은 무의미한 반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꼭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시 그렇게 태초부터 존재하는 분이시고, 사도 요한도 그 용어를 두 분을 다 가리키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다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공동체 가운데 있는 장성한 연령과 신앙의 사람들에게, 너희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매우 깊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이 우리 교회에도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하나님을 깊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삶으로 깊이 알고, 말씀으로 깊이 알고, 기도로 깊이 알고, 신앙 경험으로 깊이 알고...
사람에게 그냥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노인이 되고 늙은이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영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믿음의 아비가 되고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아는 믿음의 어른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세 번째로 말씀하는 내용은 “우리의 믿음의 승리”입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악한 자는 사탄이죠. 자녀들은 아직 사탄을 이긴 경험이 없지만, 그러나 청년들은 사탄을 알고, 그들의 모략을 알고, 그들의 미혹과 공격을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영적 경험이자 삶의 경험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직하지 못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두렵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순간순간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돈 앞에 사람 앞에 믿음의 선택 앞에 갈등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도 요한의 공동체 청년들은 그런 악한 자의 공격을 분별하고 이겨낸 믿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씀하는 우리의 믿음의 승리... 이 믿음의 승리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사도 요한은 5:4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물론 이 승리는 항상 멋지고 화려한 승리는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교회와 신자는 세상 속에 작고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며 살아가는 승리자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마침내 그날에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모든 면에서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 이상 모든 성도님들은 악한 자를 이기고, 그런 경험을 공유하고, 그런 정체성 속에 살아가는 능력 있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12과 13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한 사도 요한은 14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여기서 몇 가지 내용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이들로 바뀌고, 쓰는 것이 쓴 것으로 바뀌고, 아이들에 대한 말씀이 바뀌고, 아비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이고, 청년들에 대한 말씀은 바뀌지는 않았지만 길어지고 추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미묘한 변화에 대해 학자들은 오래 연구하고 여러 가지 견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 복잡하기도 하고, 설교 시간에 살펴보기 어렵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그 여러 견해들이 사도 요한의 정확한 생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놔두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사도 요한은 이런 맴도는 스타일로 글을 쓴다는 사실(1장에서 서론도 그렇고 6번의 만일도 그렇고, 2장에서도 새계명과 옛계명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반복이 무의미한 반복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반복하면서 내용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해 결국 우리를 15~17절 말씀으로 인도한다는 사실... 우리가 이 정도로만 알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12~14절 말씀은 결국 우리를 15~17절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이유를 말했지만, 아직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하려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말하려고 그 이유를 두 번이나 반복한 걸까요? 네, 그 내용이 바로 15~17절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네, 이 말씀이 바로 사도 요한의 네 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과의 사귐으로 초청하는 네 번째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초청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선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바벨론적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면 ‘바벨론적 인간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네, 그 본질과 핵심이 돈과 물질주의에 있는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런 인간 세상과 역사가 바벨탑으로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돈과 물질주의는 문명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권력을 만들고 그런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런 바벨론적 세상이 사탄의 배후 속에 마침내 하나님을 어떻게 대적하고 어떻게 몰락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만들고 사탄이 만들고 돈과 물질주의가 만든 세상을 결코 사랑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하고 권면하고, 그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차있다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매우 통찰력 있는 말씀입니다.

정욕이라는 말은 욕구, 욕망, 갈망, 혹은 의지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욕구와 갈망과 의지를 가진 존재이죠.
물론 욕구와 갈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욕구와 갈망들은 어디에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지... 그에 따라 그것은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정욕은 세상으로부터 온 욕망과 갈망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온 우리 몸의 욕망들, 세상으로부터 온 우리 눈의 욕망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온 우리 삶에 대한 자랑들... 이생의 자랑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소유, 자기 일, 자기 능력, 자기 미모, 자기 자녀, 자기 아파트 ...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그런 잘못된 욕망과 잘못된 갈망과 잘못된 의지와 잘못된 자랑으로 가득차있는데, 우리는 그런 욕망과 갈망과 자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쪽 테이블에 교회 사람들로 보이는 몇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사모님, 권사님, 집사님... 그렇게 호칭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파트 이야기, 자기 자녀 대학 간 이야기, 누가 무슨 사업을 하고 돈 버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큰소리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카페에서 매너 없이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것은 매너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많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그렇게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편하게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러나 같은 세상 사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말하는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좋은 아파트를 부러워하고, 누가 돈 많이 번 것을 부러워하고, 어느 자녀가 좋은 대학 간 것을 부러워하고 ... 그것은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부러워하고 감탄하며 오래 이야기할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과 갈망은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한 마음과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새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단순히 노래방 안 가고 술 안 먹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경건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갈망과 의지와 삶의 방향을 말씀하는 보다 깊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큰 생각과 갈망이 어디에서 오는지, 또 내 생각과 의지는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또 그러면서 지금 나는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이런 깊은 차원에 대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저를 돌아보면, 저에게도 과거 제 마음속에 몇 가지 갈망과 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 때 교회 선생님들이 저에게 “너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물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겠지만, 다만 무엇을 하든 저는 베풀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은 사실 제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제 계산이 있어서였습니다. ‘내가 그런 베푸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잘살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 작은 단칸방, 잦은 이사, 매번 돈이 문제가 되는 많은 상황들을 겪으며... 그렇게 가난을 면하고 남모르게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컸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졸업을 앞둔 무렵에는 또 다른 갈망이 제게 생겼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독립적인 삶,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그리고 ‘나서지 않는 관조의 삶... 바람에 구름 가듯 그렇게 살겠다’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는 청년이었지만, 그런 이기적인 갈망을 가지고 학교를 졸업하고 제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셨을까요? 그런 제 모습 역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갈망과 의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헌신입니다.
오래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신의 제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번제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다 태우는 제사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번제를 드리며 그 제단 앞에서 그 제물과 동일시되는 영적 경험과 결단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와 같은 헌신의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신약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헌신을 예배나 성찬식을 통해 정기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런 신앙적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헌신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가? 헌신 없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헌신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세상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강하고 달콤하고 어둡고 화려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말은 현대적인 번역으로 돈, 섹스, 권력... 그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벨론 세상의 그림자에 물들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는 분이시지, 이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헌신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갈망과 의지는 선한 갈망이 되어 하나님께로 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런 헌신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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