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고전 2:6~9
2024.09.08
우리는 지금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를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인사말 이후 1:10부터 사도바울은 계속 이 문제를 말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우리도 계속 이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4장까지 계속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길어지는 말씀에 대해 혹 어떤 분은 이런 마음이 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쟁과 분파 문제가 없는데, 우리와 무관한 이 말씀을 이렇게 길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 역시 강해설교는 지루해’
네,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를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문제가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일상생활에 매우 흔한, 바로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남을 미워하고 비판하고... 그런 갈등과 분리를 안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도 지금 얼마나 갈등과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까? 역사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미움과 분열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이 문제는 갈등하고 미워하고 분열되고 하나되지 못하는 전형적인 세상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 말씀을 잘 듣고,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지혜와 신앙적 해결책을 알아서 다른 길을 걷는 대안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십자가의 도’를 말씀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십자가의 도’는 교회 안의 분쟁과 분파, 갈등과 다툼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분쟁과 분파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바울의 말씀이 ‘십자가의 도’ 하나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아이가 넘어져 심한 상처가 나면 빨간약 하나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소독도 하고 항생제 연고도 바르고 거즈도 붙이고 나중엔 흉터를 없애는 연고도 발라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파는 이중‧삼중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쉽게 생각하거나 적당한 하나의 말씀만 말해선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한 말씀으로도 해결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매번 기대하고 나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분쟁과 분파 같은 어렵고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대책도 그 말씀도 복합적이고 이중‧삼중적인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은 분쟁과 분파 문제에 대해 또 다른 귀한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 또 다른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숙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분쟁과 분파 같은 전형적인 세상 문제를 극복하고 멀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가 있더라도 같이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그 문제와 떨어진 곳에 자기 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영적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를 해결하는 사도바울의 두 번째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혜를 말하자면, 오늘날은 지혜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생활은 주로 우리 초등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는 지금 이 시대와 세상이 전체적으로 대단히 지혜롭고 밝은 시대와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지혜와 지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남도 알고, 남이 아는 것을 나도 압니다. 지식의 평등화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ChatGPT도 있고 또 다른 인공지능도 있어서, 모르면 물어보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지혜와 지식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많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당시의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혜를 찾고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신의 뜻과 진리를 인식하는 최고의 수단이자,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 만연했던 신비종교에서는 지혜가 그 종교의 내부 핵심 그룹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만 아는 비밀스런 영적인 지혜와 지식을 말해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내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화에는 꼭 지혜의 신이 있고, 미네르바나 아테나 같은 지혜의 신은 사람들의 사랑과 숭배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당시 세상이 지혜를 추구했던 것은, 오늘날과 달리 사람들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종교적이었고 또 세상이 많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때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새로운 신자들 중에는 그렇게 세상의 지혜를 말하고 지혜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 내에 분쟁과 분파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렇게 세상의 지혜를 말하고 분쟁과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참된 지혜인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신앙적인 재교육이자 영적인 재교육이죠. 그들은 그런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지혜’라는 주제를 1:17부터 이미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렇게 사도바울은 1장 중반부터 지혜를 많이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말씀하였을까요?
고린도전서 안에서 지혜는 소피아라는 명사형으로 모두 열일곱 번 나오는데, 1~3장에 그중 열여섯 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가 말씀하는 지혜는 여기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다른 서신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피아라는 명사형 지혜는 로마서에 한 번, 고린도후서에 한 번, 에베소서에 세 번, 골로새서에 여섯 번... 그것이 전부입니다.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와 비교하면서 가장 깊이 말씀하는 곳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기 위해, 오늘 본문 첫 말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오니...”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십자가의 도를 말씀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온전한 자들 중에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나 우리가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하지 않고,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온전한 자들 중에서”라는 말씀을 할까요?
네,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에 나오는 “온전한 자들”이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내용은 길게 설명드리지 않고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온전한 자들은 3:1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 즉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온전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완전은 오직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온전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영적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가 그렇게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는 이 말씀은 지금부터 우리 신앙의 좀 더 깊은 내용을 말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여기서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내가’라고 1인칭을 사용하다가, ‘우리가’라고 3인칭 복수를 사용하는 이유는 교회 공동체를 배경으로 이 말씀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지금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내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인 십자가의 도를 말씀했다면, 이제부터는 좀 더 깊은 내용인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말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겨우 하나님, 예수님, 교회, 십자가, 회개, 천국, 구원... 그런 정도만 아는 초보 신자가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죠?
예를 들어 십자가에 대해서도 어린아이 같이 아는 초보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한 십자가... 그런 과거의 십자가만 아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어린아이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한 신자는 오늘의 십자가를 알고 자기 십자가를 아는 분입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그것을 삶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의 피만 있는 십자가는 어린아이 같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우리 자신의 피도 있는 십자가를 우리 삶과 신앙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교회공동체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가 신앙의 성숙한 자들 중에 있는 지혜를 말한다’고 말씀하며 오늘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말할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지식과 학문과 과학과 역사와 문명이 만든 세상의 지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향력있는 코스모스라는 책을 쓴 칼 세이건은 무신론 인문과학자로서 평생 우주를 탐구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합니다.
“캄캄한 우주 공간 속 창백하게 빛나는 작은 지구에 사는 인류는 좀 더 겸손해야 하고, 좀 더 서로를 사랑해야 하고, 우리를 여기 있게 한 코스모스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칼 세이건의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칼 세이건을 존경하고 그가 쓴 책을 또 읽고 또 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저도 우주의 광대함을 놀랍게 생각하는 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저는 놀라운 우주보다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의 신자로서 칼 세이건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시대마다 분야마다 많은 세상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지혜 가운데 가장 높은 지혜는 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통치하는 통치자들의 지혜입니다. 각 분야에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또 정치와 정부와 국가라는 영역에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악한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상한 지혜와 머리로 이 세상을 이끌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통치자들의 전반적인 실체를 잘 보지 못하고, 이따금씩 그들의 악한 모습과 그림자를 볼 뿐입니다.
이 내용은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권세론의 한 내용인데, 이 세상의 악한 권력과 권세와 정치와 국가와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알기는 어렵지만, 다만 우리는 그렇게 악한 세상의 통치자들이 정치와 권력과 권세와 지배 구조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경계심을 가지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지금 사도바울은 그런 세상의 모든 최고의 지혜를 말하며, 그런 최고의 지혜라도 하나님의 감추인 은밀한 지혜를 결코 알지 못하고, 또 알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그 구체적인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저 알기에 십자가는 2,000년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작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십자가는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구원 사건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난 사건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적 존재들이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악한 존재들이 만약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영적으로 또 우주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역사의 우연한 불행으로 폄하하는 모든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에 로마와 예루살렘에 맞서 개혁을 외치다 안타깝게 죽은 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작정하신 필연적 구원 사건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이 무너진 결정적 패배 사건이고, 하나님의 감추인 놀라운 지혜가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 사건입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유대 민중의 반란과 유대 민중의 불행을 막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지혜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이 관할하는 유대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 세상의 그런 악한 통치자들의 생각과 지혜,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한 사탄과 악한 영들을 이용하시어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이와 같은 십자가 사건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의 어떤 지혜보다 뛰어난 지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첫째, 세상의 지혜를 동경하거나 높이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최신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철학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를 말하고,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말하고, 최재천 교수는 사회생물학을 말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의 비결을 말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의 비결을 말하고, 정치 권력가들은 정치와 권력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그런 지혜들을 동경하거나 마음이 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이 세상과 함께 없어질 지혜들입니다. 10년만 지나도 사라질 지식과 책들이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이 영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보다 더 높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 말씀 안에 있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 선포와 우리의 기도와 믿음의 성숙한 생각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한 지혜를 세상의 많은 지혜보다 더 높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누구는 요즘 이런 말을 하고, 누구는 요즘 저런 책을 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를 사는 것이 좋고, 지금은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런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 아래에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알되,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 아래에 두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지혜를 가장 높은 곳에 두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내 지혜나 세상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경을 보면, 성경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합니다.
이 세상을 어떤 의미와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은 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1편 말씀만 해도 “우리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그 한 말씀만 가지고도 악인과 함께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한 말씀만 가지고도 이 세상의 모든 상황 속에 감사와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가운데 가장 최고봉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히려 양보하고 물러납니다.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 대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선택합니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나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친히 계산하시도록 맡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숙해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되면, 우리는 그 기도 가운데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나처럼 마음이 바뀌고 평안을 얻고... 그래서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지혜로 살아가는 큰 힘이 됩니다. 그런 영적인 힘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성숙한 신앙을 말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면, 분쟁과 분파와 갈등과 다툼 같은 세상 문제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보다 높이 두시길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지혜에 더 밝아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지혜를 이기고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세상 지혜가 난무하는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아름답게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