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2)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
고전 1:26~31
2024.08.25.
지난 주일 이광무 목사님 설교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떨린다고 말씀하셨는데, 자주 하시면 안 떨리는데 자주 안 하셔서 조금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유목사님도 그렇고... 자주 말씀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목사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아가 은혜와 도전을 받았는데, 오늘은 다시 어렵고 심각한 고린도교회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분쟁과 분파 가운데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은 예수 중심과 십자가 중심을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몸이고, 복음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 십자가의 도는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낯설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자기중심을 가지고 자기 지혜로 열심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와 닿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시민 씨를 많이 알고 계시죠. 저도 그분을 잘 알고 이전부터 그분의 책을 간간이 보곤 했는데, 최근에 그분이 쓴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이 시대의 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분이 얼마 전부터 오늘날 과학의 새로운 지식에 많이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의 새로운 지식으로 새롭게 세상과 종교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바라본 내용을... 그렇게 책으로 써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분이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무척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법한 데... 이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만 한 데...’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그런 두 갈래 길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과 과학과 자기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비록 오늘날 과학이 말하는 내용대로 이 세상과 우주가 아무 목적이 없고 우리는 다만 유전자의 생존 기계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의미가 없으므로 의미를 찾지 않고 다만 스스로 삶에 따뜻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생각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죠.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기중심은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을 몰라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이기보다는 안타까운 것입니다.
불교도 그렇습니다. 불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불교는 어떻게 보면 붙들 것이 마음 하나뿐이기 때문에 마음을 붙들고 있는 종교입니다.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순수 불교는 나쁜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붙들어야 할 대상은 마음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넘고 마음을 넘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시민 씨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일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교수님은 노년에 하나님을 찾았는데, 아무쪼록 유시민 씨도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을 꼭 찾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이렇게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는 일은 세상 사람에게 너무 낯선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 더욱 깊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두 번째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우리 삶에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는지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십자가의 도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우리 삶에 어떻게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이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첫 말씀 26절에서 세상의 기준과 방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3가지 세상의 기준과 방법을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받은 교육과 지식, 그리고 그가 가진 부유함과 권력, 그리고 그가 속한 가문과 신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3가지 기준은 기준임과 동시에 그 기준을 추구하는 3가지 삶의 방법이 됩니다. 다 많은 교육과 지식을 소유하고, 다 큰 권력과 부를 얻고, 다 훌륭한 가문과 신분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와 같은 기준과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 좋은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박사 학위를 받고자 합니다. 학벌이 좋으면 어디 가도 대접을 받습니다. 목사도 큰 교회 가기 위해서는 유학을 다녀오고 박사 학위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유해지고 좋은 곳에 살고자 합니다. 서울 강남이나 부요한 지역에 가면 길거리의 사람이나 도로의 차나...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런 곳에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봅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배경이나 가문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의사 집안, 판검사 집안, 교수 집안, 고위 공직자 집안... 그런 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가기라도 하면, 그 집안은 그날부터 자랑스런 서울대 집안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이 26절 말씀은 너희가 그런 세상적인 기준과 방법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적인 기준과 방법으로 볼 때에, 너희 중에 그런 유력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는 회당장 그리스보나 고린도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나 부유한 가이오 같은 유력한 신자도 있었지만, 교인의 대다수는 그렇게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평범한 신자들이었습니다.
대다수가 평범한 그들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를 잘 모르고,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과 세상적인 방법에 물들어 있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과 분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27~30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새로운 기준이고, 또 우리가 그 기준을 알 때 달아지는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법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읽어야 잘 이해됩니다. 27~30절에 다 십자가를 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의미는 매 구절마다 ‘십자가’를 넣어야 올바른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2장으로 넘어가면 십자가의 도에 대한 세 번째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이렇게 ‘십자가’를 넣어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를 넣어서 오늘 본문을 읽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새로운 기준과 방법을 묵상하면,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병아리와 닭을 키우는 주인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손길을 따라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는 병아리를 기뻐할 것입니다. 반면에 정성껏 길러도 잘 자라지 않고 시들시들하고 털이 빠지고 한쪽 구석에 늘 힘없이 있는 병아리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예쁘고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돈 많고, 똑똑하고 박식하고, 좋은 가문에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을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보십니다.
그러고보면 세상 속에서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볼 때,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지혜와 능력과 배경 속에 세상을 지배하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우리는 대부분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연약한 그런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르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세상의 잣대와 기준으로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기준과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을까요? 왜 그 죽음과 패배와 고난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영광과 능력과 위대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다르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그 죽음과 패배와 고난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방법이자 하나님의 특별한 자기 계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일하시는 분이신지...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과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과 다른 새로운 삶의 기준과 방법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교만과 자기중심과 자기 지혜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원과 자기 계시와 새로운 기준과 방법을 깊이 이해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고,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분파 문제에 대해 십자가의 도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인 십자가의 도를 참으로 믿는 신자라면, 분쟁과 분파는 그런 하나님의 뜻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상적인 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제 생각에... 사도바울의 이와 같은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말씀치고는 너무나 고차원적인 말씀 같습니다. 분쟁과 분파 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까지 깊이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이 말씀을 주셨고, 또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도에 대한 이 말씀을 단순히 분쟁과 분파 문제에 대한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복음의 귀한 진리인 줄 알고 우리 신앙과 삶에 잘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도 하고 새로운 기준과 방법이기도 한 이와 같은 십자가의 도를 우리 삶에 어떻게 잘 적용해야 할까요?
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준과 방법을 우리 삶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세상적인 기준과 방법을 점점 버려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건강해지려면, 좋은 것을 많이 먹으려고 하지 말고, 안 좋은 것을 안 먹으려고 해야 한다...’ 네, 맞는 말씀이죠. 영양제 먹고 인삼 먹고 보약 먹고... 그러면서 매일 술 먹고 달고 짠 음식을 많이 먹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도 좋은 신앙이 되려면 능력 받고 은사 받고 방언 받고 그런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의 오랜 세상적인 기준과 삶의 방식을 밀어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를 따라 세상의 방식으로 지식과 학벌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 사회의 1%에 속하기 위해 일류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유학 다녀와도 어렵지만, 예전엔 좋은 대학 나와서 유학 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안에 학문과 가르침에 뜻이 있을 때는 그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과 학벌을 위해 그런 길을 가는 것은 십자가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이 세상의 기준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교마다 교수답지 못한 교수, 학자답지 못한 학자가 많습니다. 학생들을 성실히 가르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만 열심히 합니다. 우리 사회에 곳곳에 그렇게 지식과 학벌을 가지고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런 세상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를 따라 세상의 방식으로 부와 권력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와 권력은 세상에서 우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와 권력이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듭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저성장 국가입니다. 예전처럼 직장을 성실히 다니며 돈을 벌어선 부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영끌해서 아파트를 사고 코인 투자를 하고...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기존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성세대도 부동산 투자를 하고 아파트를 사고 팔아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고 부와 재물을 주신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런 세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얻고 누리려고 한 사람이 많습니다. 집이 부족하고 집을 사놓기만 하면 돈을 벌던 그 시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적인 길을 믿음으로 가지 않은 신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그런 세상적인 유혹을 받고 큰 교회가 되려고... 교회를 크게 건축한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걸으며 안타깝게도 세상적인 교회가 된 교회가 많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돈을 벌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복음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돈에 매이지 않는 선한 부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을 선택하시고, 세상의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그 손길 가운데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올해 초 한 방송프로그램에 유아용 매트를 만드는 한 기업의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되었습니다. 업계 1위였던 그 기업은 어느 날, 자사 매트에서 유해 물질이 나온다는 고발 민원과 이어진 비방과 악성 댓글로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매출은 1/10 토막이 나고 거의 망하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은 몇 사람만 남고 다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발과 악성 댓글을 주도한 곳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그곳은 바로 업계 2위로 있던 기업이었습니다. 그 2위 기업의 대표는 수개월에 걸쳐 아주 조직적으로 그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2위 기업의 대표가 침례 교단의 한 대형교회 해외선교팀장을 맡고 있는 신자라는 사실입니다. 직분은 장로에 해당하는 안수집사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담임 목회자와 동행하여 아프리카 해외선교 집회를 가서도, 그 일을 계속 점검하고 지시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큰 교회의 가장 중심에, 그렇게 전국을 다니고 해외선교를 다니는 열정과 영성 있는 목회자 곁에, 그렇게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고 아무 죄의식이 없는 신자가 있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기업은 업계 1위가 되었고, 지금도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세상 속에서 강하게 되고 높아진 그분과 그분의 사업을 기뻐하실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적인 기준과 방법으로 부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양심을 속이며 이익과 부를 얻고... 그런 것은 십자가 복음을 믿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부와 물질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꺼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가는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살 수도 있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라도 괜찮습니다. 중저가 옷을 입고, 일반 가방을 들고, 좋은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세상 속에서 작은 자들이 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의 영적인 신분과 자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보상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자리보다 우리의 자리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귀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안에 있는 변함 없는 은혜와 감사와 평강...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은혜와 감사와 평강이 우리 마음 속에 흐를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훌륭한 가문을 만들고 훌륭한 배경을 추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판검사 집안, 의사 집안, 교수 집안, 재벌 집안... 세상은 그런 집안을 부러워합니다. 명절이 되면 그런 가문의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께 인사하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가문은 그런 세상의 힘을 가진 세상의 가문들이 아니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영적인 가문입니다. 명절에 모여 사랑으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가정이 복되고 훌륭한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과 가문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고, 부모의 오랜 기도와 삶으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런 아름다운 영적인 가정과 가문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기준과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가장 분명하게 계십니다.
능력을 행하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이 모인 화려한 곳에는 하나님이 안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진실한 마음과 십자가를 품고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려는 약하고 작고 눈물 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하고 힘들고 눈물 날 때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 광복 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를 믿는 자로 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을 받고 나라를 사랑하는 좋은 독립운동가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처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를 쓰거나, 그분들에게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신앙을 가지고 그 불의한 시대를 세상적으로 잘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기독교를 필연적으로 박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세상적으로 잘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기준과 방법으로 바르게 살기를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