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믿음찬교회 0 50 05.14 13:42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히 12:4~13
2024.05.12.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우리 공동체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르신들께 사랑과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고,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을 늘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버이 주일을 맞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바로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의 전체 메시지는 어떻게 보면 너무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천사와 모세와 멜기세덱과 구약의 성소와 제사와 속죄에 대해 많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은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대단히 깊고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통해 권면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10장 중반부터 계속된 그 메시지는 바로, ‘너희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고, 인내하며, 너희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1장에서 믿음을 말씀했고, 1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나, 계속 그 메시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의문 하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너희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의 절정이 아니었던가?...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네, 십자가가 절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생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절정이고 모든 문제의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의 절정을 도대체 어떤 말씀으로 하고자 하는 걸까요?
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우리가 조금 후에 보게 될 12장 중반 이후 그 절정의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앞서 지나온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큰 내용, 그리고 이제 나올 ‘히브리서의 절정’이라는 큰 내용... 그 사이에 위치한 본문입니다. 그 사이에 위한 본문은 2개인데, 하나는 징계에 대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에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두 말씀 중 하나인 징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징계’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략 8번 정도 나옵니다.
신약을 통틀어, ‘징계’라는 말은 총 11번 나오는데, 고린도전서에 1번, 고린도후서에 1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1번... 이 3번 외에는 다 오늘 본문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히 오늘 말씀은 ‘징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징계라는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어쩐지 오늘 말씀의 분위기가 딱딱합니다. 읽어봐도 이 말씀이 따뜻한 말씀인지, 딱딱한 엄한 말씀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분위기도 어둡고, 어쩐지 엄한 말씀 같고, 또 오늘날 우리가 잘 말하지 않는 징계에 대해서 말하고...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자세히 보기보다는 슬쩍 지나치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은 참 따뜻한 말씀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잠언 말씀도 가서 읽어보면 따뜻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맨 마지막 말씀도 따뜻한 말씀입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고...” 마치 사랑하는 부모가 어린 자녀를 어루만지는 손길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오늘 본문이 따뜻한 말씀인 이유는 이 ‘징계’라는 말을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징계’는 헬라어로 ‘파이데이아’입니다.
그런데 이 ‘파이데이아’는 에베소서 6: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교훈으로 번역한 말이 ‘파이데이아’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3:16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교육으로 번역한 말이 ‘파이데이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히브리서는 ‘징계’라고 말하고, 에베소서는 ‘교훈’이라고 말하고, 디모데후서는 ‘교육’이라고 말하는 이 ‘파이데이아’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훈련과 훈육입니다. 영어로는 training and discipline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잘못에 대한 징계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이끌어간다고 하는 보다 넓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징계’라는 말을 보다 넓고 친숙한 표현인 ‘훈련’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참 따뜻하고 은혜로운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징계하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꾸짖고 바로잡으시고 훈련하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오해를 풀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5~6절은 잠언 말씀의 인용입니다, 7~8절은 훈련의 필요성입니다. 9절은 훈련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10~11절은 훈련의 유익입니다. 12~13절은 따뜻한 격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의 순서를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먼저 5~6절은 잠언 말씀의 인용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잠언 앞부분은 솔로몬 왕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은 “내 아들아~”라고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잠언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잠언 말씀은 이에 비해 조금 딱딱하고 엄한 느낌이 납니다.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가 아니라,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기뻐하는 아들’이 아니라 ‘받아들이시는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징계하신다’가 아니라, ‘채찍질하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히브리서의 잠언 말씀이 원래 잠언 말씀보다 조금 더 딱딱하고 엄한 느낌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히브리서는 이 말씀을 70인역 성경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맛소라 성경은 조금 부드럽고, 구약 헬라어 70인경 성경은 조금 딱딱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조금 엄한 부모님이 있고 조금 부드러운 부모님이 있죠. 그러나 어느 부모님이건, 부모님의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채찍질하신다’라는 70인경의 표현에 당황하지 말고, 우리를 훈련하시고 훈육하시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7~8절은 훈련의 필요성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그런데 이 말씀은 원문에 너무 충실하려다 보니 조금 어색한 번역이 되었습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인내하라 이것은 징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너희 앞에 있는 이런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훈련이기 때문에 인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7절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그래서 7~8절은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딸로 여기시고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너희는 그런 큰 시각과 안목을 가지고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7~8절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통해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아닌 세상의 아들과 딸은 그냥 두십니다. 세상과 자연의 원리에 맡겨놓으십니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다 잘못되고 못 살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 되고 건강하고,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조금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치고 그냥 순탄하고 잘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시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기 자녀를 필연적으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필연적으로 징계하시고 훈련하시고 이끌어가실까요?
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주 안에서 빛이 되었지만, 동시에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배워가야 합니다. 마치 왕세자가 철저한 교육을 통해 점점 왕으로 준비되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세자를 세우고 나서 가만히 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왕으로 만들어 갑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인생의 사건과 사고로 하나님께서 다듬어 가셨습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조용히 어머니 곁에서 얌전히 살던 야곱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집을 떠나 아무 의지할 데 없는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야곱은 한평생 얼마나 하나님의 손길에 시달렸는지... 그 조용하고 나약하고 이기적이던 사람이 노년에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밝아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반드시 만지시고 훈련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이런 시련과 고난과 성장과 변화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믿음의 시련과 어려움을 나쁘게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기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불행을 자초해서는 안 되지만, 믿음으로 성실히 살아갈 때,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입니다.
지금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사회적 불이익은 그들이 잘못 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자초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믿음의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그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동일합니다. 나의 잘못이 아닌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오는 시련과 고난인 줄 알고, 어려워하지 말고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잘 감당하는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9절은 이와 같은 믿음의 시련과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혹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동시에 늘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믿음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고 1년 정도 교인은 저희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개척교회가 아니라 가족교회를 개척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아이 한 명이 예배에 왔다가 가고, 그리고 1년 후 몇 명의 아이들이 오기 시작하고, 그리고 한 분 두 분 그렇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2~3년간 아주 마음이 어려울 때, 어느 날 문득 참 이상한 점 하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이 너무 평안한 것입니다.
저도 집사람도 우주도 주해도... 아픈 사람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고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생활이 조금 어렵긴 해도, 그 외에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울타리를 만들어 지켜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오히려 수시로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부러지고, 수술도 받고, 가끔 우주도 놀라운 소식을 전해오고...
그래서 지금 다시 돌이켜보아도 그때는 하나님께서 저희 어려움을 아시고 특별히 지켜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나 슬프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한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신앙에 너무 빠져서 세뇌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교회에서 목사가 사람을 이상하게 세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언제나 믿는 자녀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날 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죄수들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11절은 훈련의 유익입니다.
10절 말씀은 훈련의 유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말하는 훈련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네,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 곧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고 만지시고 인도하시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성품 안에 거룩함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1등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후 14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
예전에 우리 교회 안에서 1등 신자를 이런 기준으로 많이 말했습니다. 전도, 기도, 능력, 방언...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많이 받고 방언까지 하면 그 사람은 1등 신자였습니다. 목사님들이 그런 기준으로 1등 신자를 많이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많이 받고 방언까지 하면... 그건 너무 훌륭한 신앙이죠. 그런데 사실 그 기준은 교회 안에서 훌륭한 신자가 되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과 같은 성경 말씀을 보면 성경은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생소한 기준을 말씀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한 모습...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1등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 많이 하는 집사님도,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도, 성령 충만한 장로님도,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도... 다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깨끗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신앙이 됩니다.
전도는 많이 하는데 깨끗한 삶이 없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돈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고, 성령의 은사는 많은데 자꾸 사람들과 다투고, 능력은 있는데 세상적인 정치를 하고... 그러면 그건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깨끗함과 거룩함이라든지, 사람과의 화평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런 기준들을 더 귀한 믿음의 기준으로 알고 신앙 생활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1절 말씀도 훈련의 유익을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서 의와 평강의 열매라는 말씀은 이대로 의와 평강의 열매라고 읽어도 되고, 아니면 평화로운 의의 열매라고 읽어도 됩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가능합니다. 영어 성경들도 각각 이렇게 양쪽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후자로 읽은 것이 조금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연단 받은 자들은 평화로운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
조금 전 1등 신자의 기준이 거룩함이라고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1등 신자의 또 다른 기준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연단을 받고 시련을 통과한 신자는 아주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면서, 동시에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 되기만 해선 안 되죠. 우리는 깨끗하면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로 연단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그런 하나님의 의와 정의가 우리 안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놀라운 영적인 열매입니다. 의의 열매는 곧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징계와 훈련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많은 손길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를 더욱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씀을 귀한 말씀으로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 이렇게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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