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임마누엘의 은혜

믿음찬교회 0 183 2023.12.24 11:48
임마누엘의 은혜
마 1:22~23
2023.12.24.

예수님의 성탄의 기쁨과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탄 예배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면서,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임마누엘의 은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서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첫 말씀이 매우 뜻깊은데, 조금씩 다릅니다.
1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소개합니다.
2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리고 그리스도로 소개합니다.
4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또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첫째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윗의 자손으로, 말씀으로,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이와 같이 첫 말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내용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소개하는 것은 어떨까요?
네, 임마누엘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첫 번째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고, 그분이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죠.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조금 작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한 말씀도 여기 밖에 없습니다. 신약을 통틀어 오직 여기에만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들의 보편적인 호칭이 아니라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특수한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작고 특수한 호칭인 임마누엘이 의외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고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호칭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그런 내용을 고백하는 찬양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익숙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임마누엘은 그때는 신약성경이 한 번만 말씀한 생소한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보편적인 호칭이 되었을까요?
네, 그것은 성경이 기록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임마누엘의 의미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여기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언제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임마누엘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부르는 가장 중요한 호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큰 은혜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이사야서가 맨 처음 말씀한 예언인데, 어떻게 이 예언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 예언을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도 이 예언을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당연한 말씀이겠지만, 이 이사야서의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부활을 경험한 후에, 그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즉 사후에 이 예언을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경의 예언이 그렇게 사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오래전 이 이사야서 예언 자체에 그와 같은 초자연적인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그렇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단지 마태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마태 이전에 이미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이 이사야서의 임마누엘 예언이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탄생에 대한 예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사야서 7: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네, 이사야서는 본래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BC 3세기경 유대인 학자들이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을 만들 때, 이 이사야서 말씀을 ‘젊은 여자’에서 ‘처녀’로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은 예수님께서도 보시고 인용하신 매우 권위 있는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그 단어를 그렇게 바꾼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학자들이 이사야서를 연구하면서, 이사야서 7장부터 11장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궁극적으로 메시아 예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7장에 처음 임마누엘이 등장합니다. “보라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본래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주신 예언입니다.
그때 아하스 왕은 함께 앗수르를 치자고 하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 두 나라 연합군의 임박한 공격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이 임마누엘 예언을 주셨습니다.
이 예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한 미지의 젊은 여자, 즉 아마도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거나 혹은 아하스 왕의 아내일 가능성이 높은 한 젊은 여자가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이 자라서 선악을 구별하는 나이가 될 즈음에 즉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지금 너희를 위협하는 그 두 나라가 멸망한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 나오는 ‘젊은 여자’라는 말이 조금 묘한 말입니다. 정상적으로는 ‘젊은 여자’라는 ‘알마’ 대신에, ‘결혼한 여자’를 의미하는 ‘잇샤’가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예언은 이사야의 아내이거나 혹은 아하스 왕의 아내이거나 아무튼 그런 한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여자는 당연히 결혼한 사람일 것이고 그러면 거기에 알맞은 단어는 ‘잇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은 이상하게도 여기에 ‘잇샤’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단순히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즉 결혼한 젊은 여자일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일 수도 있는 이렇게 모호하고 잘 사용하지 않는 ‘알마’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말씀하는 이 특이한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단지 이 단어 하나가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연구하면서 이보다 더 큰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서 7장을 지나 8장에 가면 또 다른 임마누엘이 나오죠.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예언은 남 유다 왕국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임마누엘이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임마누엘이 남 유다를 가리키는 새로운 의미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 7장의 처음 임마누엘은 아하스 왕 시대의 한 아기를 가리키는 예언이었는데, 8장에서는 유다 나라를 가리키는 예언으로 한 단계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후 이사야서는 임마누엘인 유다의 심판과 회복에 대한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9장에 가면,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신 바 있는 갈릴리 땅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갈릴리)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네, 이 예언은 유다의 회복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는 예언으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가리키는 예언입니다. 즉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유다의 회복이 갈릴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사야서 말씀은 10장을 지나 11장에 이르면,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메시아 예언이 나타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 예언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메시아 예언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의 이와 같은 흐름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사야서는 7장에서 임마누엘 아들로 시작하여, 8장에서 임마누엘 유다와 그 임마누엘 유다의 심판과 회복을 말씀하고, 9장에서 유다의 회복을 보다 구체적으로 메시아의 갈릴리 사역으로 말씀하고, 마침내 11장에서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임마누엘 예언은 7장에 국한된 단순한 아하스 왕 때의 예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7장부터 11장까지 이어지는 메시아 예언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예언은 큰 예언입니다. 한 아들에 대한 예언이면서, 유다에 대한 예언이면서, 유다의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이면서, 메시아 사역에 대한 예언이면서, 결국 메시아 출현과 연결되는... 그래서 한 마디로 메시아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연구하는 유대인 학자들은 이와 같은 이사야서의 흐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을 만들 때, 이사야서 7:14절 말씀의 그 ‘젊은 여자’를 ‘처녀’로 바꾸게 됩니다. 그 예언은 메시아 예언의 시작으로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탄생을 말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과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과 삶과 부활을 경험한 마태도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이 임마누엘 예언을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인용하여 ‘젊은 여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에서 인용하여 ‘처녀’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를 오해하거나 성경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에 이 예언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되기에는 너무 먼 시간과 너무 먼 사람과 너무 먼 상황 속에 주어졌던 예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무관한 오래전 구약 예언을 사후에 임의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과 계획 속에 그의 아들을 보내시기 위해 이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임마누엘 예언에 대한 일말의 오해와 의심을 풀고, 이 말씀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주님이심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런 은혜의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날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오랜 기간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 유다가 망할 때,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이 성전을 떠나시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그렇게 하나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BC 6세기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떠나셨고, 나라는 망했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후 그들은 70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가 지나고 유다는 다시 신앙적으로 무너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말라기서를 끝으로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 어두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과 절망, 전쟁과 죽음, 학살과 압제... 그런 가혹한 현실이 계속되었습니다. 유다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유다에 희망이 있다면, 오직 메시아가 다시 오신다는 그 희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런 어두운 시간 속에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은 놀랍게도 임마누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왜 예수님은 더 높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신적인 이름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름으로 지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하스 왕은 신실하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한 악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백성들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비록 주님이 오실 때 유대 땅은 부패한 성전 권력과 악한 지도자들로 가득했지만,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친히 임마누엘이라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오직 하나만 필요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생각해주시는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갓난아기는 다른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2시에는 젖을 먹고 3시에는 기저귀를 갈고 4시에는 잠을 자야 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젖병도 필요하고 기저귀도 필요하고 이불도 필요한데...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 세상의 어려움과 풍랑 속에 많은 걱정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필요하고 하나님은 우리만 필요합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채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어리석어져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구원을 구하고 축복을 구하고 필요를 구하고 잘 되기를 구하고 그렇게 길게 기도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만 바라는 신앙...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는 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참된 신앙이고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름다운 모습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힘들고 어려울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겐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겐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호흡이 있습니다. 남들처럼 잘 되지 못하고 돈이 많지 않아도... 감사하며 흔들리지 않고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머무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런 모습을 현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이자 임마누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충만했고, 그들은 그 충만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임마누엘의 역사로 충만하지 못하고, 세상은 우리의 전도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역사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도 그와 같은 임마누엘의 은혜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이 뭐가 부족할까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을 의지했던 느헤미야도 그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고 자주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을 우리도 늘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으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가고 있고 힘이 없고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동행할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그 나누어주신 말씀과 떼어주신 떡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줍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은 오늘 이 기쁘고 복된 날... 우리는 임마누엘이신 우리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에게 언제나 임마누엘의 은혜와 감사와 평안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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