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마음의 완악함 (1)

믿음찬교회 0 144 2023.12.21 15:56
마음의 완악함 (1)
막 3:1~6
2023.12.08.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오래도록 지켜왔던 안식일 전통에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단 안식일 전통뿐만이 아니라, 율법을 잘못 이해한 그들의 모든 잘못된 제도와 전통에 반대하셨습니다. 나아가 성전과 율법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을 폐지하시고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안식일 전통 반대는 그런 큰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그 일을 반드시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안식일 전통에 대한 반대와 개혁을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 반대를 안식일 날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그 회당은 가버나움 회당으로 여겨집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버나움은 도시였기 때문에 가버나움 회당은 시골의 작은 회당이 아니라 성인 수백 명이 모이는 큰 회당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회당 안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선제적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그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시고 그들에게 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이 예수님의 질문을 예상 못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 예수님의 질문이 어려웠던 것일까요?... 아무튼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질문은 어려운 질문이라기보다는, 답을 알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선을 행하는 것이 옳죠.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해선 안 된다는 율법적인 생각만 했지,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들은 속으로 무척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준비했다면, 아마도 이런 대답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안식일에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치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날에 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식일이 금지하는 노동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그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예수님은 또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기분이 상하시고 흥분하셔서 “내가 전에 안식일에 귀신을 쫓아낼 때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조용하더니, 오늘은 왜 이것을 문제 삼느냐? 너희는 어떻게든 비열하게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구나...”
네, 예수님께서 당연히 이렇게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0~11) 
네,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을 일이라는 기준이 아닌 선이라는 보다 높은 기준으로 볼 때, 율법의 안식일 가르침에 예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 너희의 안식일 해석과 안식일 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잘못된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해석과 안식일 법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속 믿었죠. 그래서 그들은 나가서 헤롯을 지지하는 헤롯당과 모의를 합니다.
본래 바리새인은 종교인들이고 헤롯당은 정치인들인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합의를 합니다.
네, 이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과 안식일 치유, 그리고 이런 갈등과 대립의 결과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하는 사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와 같은 내용은 우리가 지난주까지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내용을 다시 살피지 않고, 다만 오늘 본문 가운데 있는 한 부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4~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며 노하셨다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본래 예수님은 좀처럼 화를 안 내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인간적 감정을 비교적 잘 기록하는 마가복음 안에서도 예수님의 노하심은 극히 드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자, 그때 예수님이 노하신 적이 있으시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받으실 때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예수님을 쳤는데, 그때 예수님이 약간 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의 노하심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런 드문 사례를 고려할 때,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탄식과 노하심이라고 하는 이 이중 감정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 한가운데에 손 마른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죠.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답을 알았지만 답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올바른 답을 거부하고 마음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보셨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마음의 완악함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한자어 ‘완’은 ‘무디다’는 말이고, ‘악’은 ‘악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완악한 마음은 ‘둔하고 악한 마음’입니다. 원어인 헬라어나 영어 번역도 다 그런 의미입니다. ‘둔하고 악하고 굳은 마음...’ 다른 말로 하면 ‘강퍅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이런 마음으로 올바른 말씀과 진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 안에 작동하는 마음과 심령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탄식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고 고의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선하고 아름답게 달라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아무리 정통신앙을 고백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위선과 거짓입니다. 무지하고 둔하고 굳은 악한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따뜻하고 부드럽고 선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하나님의 역사이고 올바른 신앙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그들이 그들의 조잡한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굳은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오래도록 거룩하게 신봉했습니다. 그것을 외우고 붙이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세부지침을 만들고... 율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열성적으로 믿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안에 진리를 아는 마음과 심령은 오히려 흐려지고 퇴보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완악한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이것은 그들 신앙의 위선과 거짓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년 뒤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폭로하시게 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탄식과 분노를 통해, 인간의 변화되지 않은 완악한 마음이란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이어서 계속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