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2024.08.11.
우리는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말씀을 보면서, 고린도교회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 속에 복음의 큰 가능성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워진 지 3~4년 되는 짧은 기간에 크게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장에 걸맞게 모든 은사를 풍성히 주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교회는 그렇게 너무 일찍 성장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교회입니다. 구원을 오해하고 성령을 오해하고 교회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러 분파가 생기고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잃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고린도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로서 이와 같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복음과 기독교 신앙이 가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다른 말씀으로 고쳐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를 바르게 알 때, 근본적으로 고쳐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맨 처음에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제 개인 생각에 성경을 통틀어 단 10개의 말씀을 선정한다고 할 때, 당당히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말씀입니다. 10개의 말씀엔 어떤 말씀이 있을까요?
창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출 20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시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2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 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마2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요 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롬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오늘 말씀을 포함하고, 맨 마지막으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요한계시록 말씀을 포함하면 모두 10개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십자가의 도에 대한 말씀은 이와 같이 성경을 통틀어 10개의 말씀에 들어갈 정도의 중요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말 자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더 번역하면, 여기서 ‘의’는 목적격 의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말씀’은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멸망하는 자들’은 ‘멸망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는 우리’도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가 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린도교회 일부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구원의 시제를 이렇게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뚜렷이 번역됩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멸망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이 세상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됩니다.
당시로선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한 변방 유대지역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한 정치범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전하는 복음은 좋은 말로 미련한 것이요 심한 말로는 미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전하기 참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을 열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기를 둘러싼 자기 지혜를 깨고 십자가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은총을 입어 구원받았고 또 구원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여기까지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멸망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
그런데 그다음 말씀이 사실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왜 우리에게 능력이 될까요?... 그리고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왜 능력 중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될까요?... 알 듯 말 듯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19절 이하 말씀은 이와 같은 18절 말씀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왜 십자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지, 세상의 지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지... 사도바울은 계속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오늘 사도바울 말씀은 조금 철학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조금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의미를 알면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 주에 예방 차원에서 안과병원에 갔습니다. 올해 초에 비문증이 눈에 나타났다가 곧 없어졌는데, 지난주부터 다시 나타나 심해졌습니다. 실타래도 떠다니고 작은 점들도 떠다니고... 제 눈이 청소 안 한 어항이 된 느낌입니다. 다행히 검사 결과 단순 비문증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 비문증도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우리 눈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러나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눈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왜 비문증이 생기는지, 치료는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 것처럼 오늘 말씀도 철학적이면서 신학적인 말씀이지만, 설명을 조금만 곁들이면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이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가...?
우선 이 말씀은 지금... 십자가의 구원과 죄 용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가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과거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십자가의 현재적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은, 구원을 받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 믿는 자들의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다른 그런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은 이 세상을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자기 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세상의 지혜입니다.
돈을 벌고 성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위험이 있으면 요령 있게 피하고 어려움이 오면 미리 대비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로 달려가고... 그렇게 자기 지혜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지혜는 2가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의 지혜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 세상엔 평화가 없습니다. 개인도 늘 싸우고 나라도 늘 싸웁니다. 개인도 욕심을 부리고 나라도 욕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세상엔 평화가 없고 욕심과 죄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이 세상에 참된 영적인 사람과 현인이 어디 있느냐, 지식인과 전문가 어디 있느냐, 비평가와 평론가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죠. 종교의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들, 개인의 삶에 대해 조언하는 무당이나 법사들, 사회적 이슈나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각계 전문가와 대학교수와 정치인과 비평가들... 그러나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둘째,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어두운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하시고 운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는 무엇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자기 지혜로 살아갑니다.
나아가 세상의 지혜는 자기 하나님을 만듭니다. 자기의 신을 만들고 우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절하고 복을 빕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지혜는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오늘 말씀에서,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의 지혜를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우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세상에 선포하고 또 안으로 우리 자신에게 선포하면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우리의 본성인 이기적인 자기중심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중심을 가지고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열심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새로운 피조물로 새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납니다.
모세는 처음에 자기 힘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살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는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아이 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이었지만,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믿음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화답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런 변화는 구약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고 안식을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와 같은 진리는 신약 성경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와 같은 진리를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가집니다.
이 새로운 믿음은 하나님을 내 힘으로 강하게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믿음은 그런 강한 자기 신념이자 자기 확신이지만, 십자가의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십자가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적인 믿음인지, 참된 성경적인 믿음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믿음은 큰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가 약해질수록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후서 말씀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도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교만, 자기중심, 자신감, 인간적인 힘, 내 계획, 내 지혜, 내 믿음... 이런 것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인 됨을 오히려 깊이 깨닫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믿음은 내가 내 힘으로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자기중심을 가진 자신감 넘치는 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중심에 모신 겸손한 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새로운 세계관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쫓아가는 좁고 불완전한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더 큰 세계관이 되고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새로운 방식은 더 똑똑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많은 힘을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경쟁하는 그런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더 낮아지고 더 내려놓고 더 양보하고 더 하나님께 맡기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그 놀라운 능력과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됩니다.
저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 그저 몇 사람이라도 의미 있게 모이는 교회를 기도했습니다. 큰 교회나 큰 성장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이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면 같이 어려움을 겪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개척교회들 다 안 되는데, 나만 어려움을 피해주시고 나만 잘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대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비를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비를 맞으면서 무언가 기성 교회와 다른 교회로 모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의 기도와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보셨는지...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나쁘게 보시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몇 번 ‘이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할 때도 있었지만, 계속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직 저의 집에는 낡고 초라한 들에핀교회 간판과 십자가가 걸려있습니다. 잘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초라하고 미련한 교회처럼 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것을 연약한 저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어렵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마다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전도를 안 해서 그렇다,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성령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말씀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그 어느 의견에도 우리 한국교회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은 너무 강합니다. 웬만한 교회들은 다 너무 멋집니다. 예배는 화려하고 말씀은 세련되고 목사님들은 다 똑똑하고 지혜롭습니다. 매년 열리는 국가조찬기도회에는 어김없이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들은 갈수록 안 되고 있습니다.
그 영적인 이유와 원인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능력과 지혜가 가득하고,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 받고 죄 용서받는 과거의 십자가만 있지, 그 앞에 무릎 꿇고 나를 부인하는 오늘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 교회들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사도바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십자가의 도를 품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조건 양보하고 무조건 패배하고 무조건 초라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와 같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길과 원리를 우리 삶과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많은 기도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분쟁과 분파로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십자가와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이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고린도교회가 깨달을 때, 고린도교회는 분쟁과 분파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십자가의 도를 우리의 새로운 믿음과 정체성과 세계관과 삶의 방식으로 깊이 수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무쪼록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