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찬교회 0 117 04.16 15:55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
히 11:17~19
2024.04.14.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가...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진광불휘 진수무향... 진정한 빛은 반짝이지 않고 진짜 좋은 물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믿음도 있고 가짜 믿음도 있습니다. 진짜 믿음도 있고 진짜와 비슷한 사이비한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가짜 믿음과 사이비한 믿음은 진짜 믿음을 오해하거나 진짜 믿음이 변질 될 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 11장 말씀을 통해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혹 오해하면, 안 보여도 무조건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안 보이고 의심스럽고 아무 증거가 없고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 혼자 ‘이게 믿음이야’ 하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나아가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생활과 성숙한 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같은 영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말씀과 기도와 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잘 뒷받침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혹 오해하면, 믿음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믿음만 붙들고... 그러나 믿음에 치우쳐 아무 준비와 노력과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바라는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믿음은 가졌지만, 늘 실패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최선 속에 삶의 최선이 있는 균형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혹 오해하면,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선물 같은 후한 상을 주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를 찾는 자들이란 어려움 속에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상이란 그런 사람에게 보상하시는 보상의 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상을 쉬운 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믿기만 하면 얻는 쉬운 상으로 오해하지 말고, 믿음의 손과 발과 수고와 실천이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는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진짜 믿음을 오해하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이 믿음을 올바르게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오늘 말씀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크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 이 믿음을 우리가 오해하면 어떤 잘못된 믿음이 될까요?
네,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무서운 믿음이 됩니다.
부모에게 자녀란 어떤 의미일까요? 네, 자신의 전부이며 자신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녀를 드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드려도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드리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정말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오해하면 아주 무서운 믿음이 되고, 그런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도 아주 무서운 하나님이 됩니다.
만약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떤 잘못된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요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네, 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1978년 남미 가이아나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가이아나는 베네수엘라와 수리남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남북한을 합친 크기 정도 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1978년 짐 존스의 인민사원 집단 자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짐 존스는 미국에서 인민사원이라는 기독교 이단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인민사원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인민 사원의 줄임말입니다.
그는 처음에 교회를 다닌 신자였는데, 목사가 되는 준비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작은 교단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인민사원 복음 교회가 커지자, 교단을 탈퇴하고 교주가 되었습니다.
짐 존스는 신자들에게 전 재산을 바치도록 하고 여러 가지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습니다. 문제가 커지자, 남미 가이아나로 집단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이후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이 집단을 추적하여 의원과 조사관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집단자살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밤에 신자들을 다 모으고 촛불을 켜고 ‘하얀 밤’이라고 하는 만찬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 잔에는 독이 들어 있다고 말하며, 나를 믿는다면 이 잔을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 독은 없었습니다. 신자들이 마셨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나는 너희가 살아있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런 만찬의 밤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 그는 모든 잔에 진짜 독을 넣었습니다. 그리하여 약 200명의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91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바로 그런 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맹목적으로 믿고 절대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바치도록 하는 믿음... 악한 교주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짐 존스의 인민사원 같은 사이비 집단은 지금도, 비록 정도는 다르지만, 동일한 모습으로 이런 믿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런 믿음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치라고 하시니까 무조건 바친 것일까요? 그러면 아브라함도 존경받을 수 없고, 하나님도 찬양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말씀을 읽을 때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뭔가에 홀린 듯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 그런 모습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때의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여기서 생각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로기사메노스’입니다.
원형은 ‘로기조마이’인데, 이 말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충분한 생각 끝에 그런 확신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브라함은 비록 그 방법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하시든지 다시 살리실 것으로 확신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그런 생각과 확신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생각일까요? 아니면 어떤 근거가 있는 걸까요?
아무리 히브리서 기자라도 모세오경의 창세기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네, 근거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오늘 말씀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 같은 말씀이 창세기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바로 창22:5 말씀입니다.
모리아 산 즉 지금의 예루살렘 근방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두 명의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 말씀에서 어떤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는 아브라함의 확신이 나타나는 말씀일까요? 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냥 한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도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쟁에서도 구하시고, 바로의 손에서도 구하시고, 아비멜렉의 손에서도 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자신의 뼈아픈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랜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부재와 자신의 철저한 실패의 시간을 통해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라의 낡은 몸을 통해 이삭을 주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도 사라도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넷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삭을 통해 그의 후손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기 전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같이 주신 말씀, 약속같이 주신 사건...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섯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러 차례 직접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한 사람입니다.
대체로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적인 분위기 속에 온전히 느껴지고, 그런 감화와 감동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이 됩니다.
어떤 미국의 청교도인이 길을 걷다가 바위에 앉아 식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빵과 물을 꺼내 식사를 하려는데, 저기서 예수님께서 걸어오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 청교도인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기도와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알았던 이해와 지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이해와 지식이 자신에게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여러 경험을 통해,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느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모든 경험과 이해의 총체적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랜 경험, 자신의 실패, 놀라운 기적,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 그리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이런 모든 것들이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을 만나 어떻게 그렇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드릴 수 있어서 드렸고 믿을 수 있어서 믿었습니다”
이렇게 비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믿었던 믿음...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믿음도 아니고, 오히려 합리적인 믿음이고 이성적인 믿음입니다.
나아가 그 믿음은 믿을 수 있어서 믿은 믿음이기에, 초월적인 믿음도 아니고 불가능한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도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면, 이와 같은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 하나님께 드린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뜻 가운데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완성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믿음의 최고의 본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100%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향하여 그런 절대적인 순수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사랑이 전부를 주는 것이 사랑이듯이, 믿음은 전부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전적인 사랑과 전적인 믿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 저희 어머니 일화를 말씀드렸는데, 오늘도 어머니와 관련한 작은 제 일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학생 때 어머니가 돈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때는 집집마다 전화기가 귀했던 시절인데, 몇 달 동안 집 전화요금을 연체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어렵게 돈을 마련해서... 그날 저에게 전화국에 가서 요금을 납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법 큰 돈이죠. 지금이야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때는 큰 돈이었습니다. 저는 그 돈을 들고 시내로 나가는 길에 전화국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조금 늦게 출발해서 전화국에 도착하니 마감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창구 직원이 없는 상태에서 뒤에 있던 한 직원분에게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조금 뒤에 연체요금을 담당하던 직원이 그날까지 요금 납부가 안 된 것을 확인하고 저의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까지 전화요금을 내셔야 하는데, 요금 납부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의 어머니는 ‘아니 우리 아들이 요금을 내러 갔는데, 분명히 납부했을 겁니다. 안 냈을 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직원은 자기가 담당인데, 납부가 안 되었다고 하면서 ‘아들이 안 왔습니다. 아니면 아들이 깜빡했거나 아니면 아들이 혹시...’ 
그러자 저희 어머니는 ‘아니예요. 우리 아들은 그런 애가 아닙니다. 나는 우리 아들을 믿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하니까 그 직원이 ‘그러면 가만있어 보세요, 한번 확인해 볼께요’ 하더니 주위 직원에 물어보고 ‘예 맞네요. 다른 직원이 받았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제가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무심하게 ‘아 그래요’ 하고 넘어갔죠.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머니가 저를 항상 믿으시는구나... 또 본인의 믿음이 틀리지 않아서 아들이 자랑스럽고 기분이 좋으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믿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런 당연한 일도 요즘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나를 믿고 잘 이해해 줄까?, 내가 와 달라면 와 주고 내가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줄까? ... 확신이 안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작은 헤프닝 같은 사건이지만, 어머니가 저를 믿으시고 저도 어머니의 믿음에 잘 부응한 아름다운 사건으로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일이지만, 의심하지 않고 누군가를 전적으로 100% 믿는다는 것은 큰 기쁨이고 값진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믿고, 자녀가 부모를 믿고, 친구가 서로를 그렇게 믿고,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그렇게 믿고, 정치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를 그렇게 믿을 수 있을 때... 그럴 때 우리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전적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특히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으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잘 되면 감사하고 잘 안되면 원망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으로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전혀 기쁨을 얻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신자라면, 우리는 부모님의 약속을 믿고 하루 종일 울지 않고 부모님을 씩씩하게 기다리는 자녀와 같습니다.
부모님이 저녁에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그 약속을 믿고 하루 종일 걱정하지 않고 부모님을 기다리는 것이죠.
그런데 부모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부모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루 종일 울거나 걱정하거나 집을 나가거나 누군가를 따라가는 아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시간...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셨을 때, 우리가 부모님을 조금도 불안하지 않은 밝은 얼굴로 부모님을 맞는 자녀가 된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매우 기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믿음은 무슨 어렵고 복잡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100%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매우 당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시지, 죽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아버지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그렇게 될 때 사랑도 완성되고 믿음도 완성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을 그렇게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수많은 사건과 시간을 통해 그런 믿음을 배워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이 믿음을 아름답게 배워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마침내 나의 이삭과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그런 깊은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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