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사망에 이르는 죄

믿음찬교회 0 176 2023.06.18 11:50
사망에 이르는 죄
요일 5:16~17
2023.06.18.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로와 권면만이 아니라, 경고와 책망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고와 책망에 대체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은혜되는 말씀과 은혜되는 설교는 찾지만, 가급적 경고와 책망의 말씀은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이기에, 오늘 본문을 피하지 말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는 비록 어떤 큰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소용없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소용없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적용되지 않는 두려운 죄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그런 두려운 죄에 대한 말씀이 총 3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죄를 말씀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를 말씀합니다. 이 3개의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두려운 죄입니다.
이 3개의 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기꺼이 사탄에게 그를 내어주는 출교의 죄가 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 말씀인데, 신자 가운데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람을 공동체 바깥으로 쫓아내어 사탄에게 내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 예수의 날에는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는 앞서 말씀드린 3개의 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씀드린 3개의 죄는 다른 죄와 비교될 수 없는 최악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거두시고 십자가의 피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그 3개의 죄가 도대체 어떤 죄인지,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사도 요한은 14~15절에서 기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말씀했습니다. 뜻대로 구하면 들으시고, 또한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바탕으로 16~17절에서 한 가지 권면을 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권면인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일반적인 일이죠. 죄를 짓고 어려움에 빠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사람이 아직 자기 죄를 알지 못한다 해도,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예수님처럼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왜 할까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면서, 기도를 말씀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분명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단자들이 공동체를 깨뜨리고 나갔습니다. 남은 신자들은 약하고 초라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기도해주고...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공동체 가운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자매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사랑과 기도로 품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우리 신앙의 일이지만, 당시 사도 요한의 교회 공동체는 그것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사랑과 이해심이 필요합니다. 비판할 수도 있고 비판도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사랑과 이해심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묻거나 책망을 하는 것은 그다음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기도를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죄 지은 형제를 위한 기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한 가지 내용을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 사도 요한은 갑자기 이런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요한이 말씀하는 이와 같은 사망에 이르는 두려운 죄는 무엇일까요?
2세기 터툴리안이란 교부는 요한의 사망에 이르는 죄를 살인, 우상숭배, 불의, 배교, 간음, 음란이라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중한 죄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죄를 지은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용서를 받았고 남유다 가장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 왕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한편, 오늘날에 어떤 분들은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 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고, 반면에 고백한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다.’ 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오늘 16절 말씀에 적용하면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오늘 16절 말씀은 ‘죄를 고백한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백의 유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어떤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여러분, 지금 사도 요한은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해 말하다가, 시선을 돌려 정 반대편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들에 대해 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일까요?
네, 요한일서를 계속 읽어온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공동체를 깨뜨리고 나간 이단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공동체를 나간 그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고 따라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 죄가 큰 죄냐 작은 죄냐 혹은 고백한 죄냐 고백하지 않은 죄냐...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나간 그들은 다른 예수를 믿고, 다른 하나님을 믿고, 다른 진리를 가지고, 다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행하면서 죄가 없다고 말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도 자신들의 비밀스런 영적인 지식만 알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참된 공동체를 떠났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이 사망의 죄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거짓되고 잘못된 것을 믿는 죄, 그리고 그것이 깊어져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된 신앙과 잘못된 생각이 굳어진 죄... 그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죄를 이렇게 이해하면, 이 죄는 단순히 잘못된 신앙을 추구하는 이단자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르침과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잘못된 세상 지식이 믿음이 되고 신념이 되고 깊어지고 굳어지면... 고칠 수 없습니다.
그 잘못된 지식은 1세기에는 영지주의였는데, 오늘날에는 이단 종교로 나타나고, 불가지론으로 나타나고, 무신론 과학주의로 나타나고, 물질만능주의로도 나타나고, 그냥 일반적인 세상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세상주의란 그냥 하나님이 싫고 교회가 싫고 기독교 신앙이 그냥 바보같고 멍청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과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과 믿음이 아주 깊어진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 마음 밭은 딱딱해진 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하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올바르고 성실하고 꾸준한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세상 물결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워도, 우리는 물 위에 있고 흔들리고 떠내려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믿음의 연륜이 있으신 분들은 그래도 괜찮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과 청년들은 얼마나 큰 세상의 유혹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너를 위해서 살아라, 하나님은 없다, 돈과 경제적 자유가 최고이다, 네가 잘되려면 남을 희생시켜라, 어떻게든 성공하고 위로 올라가라, 거짓말도 하나의 방법이고 능력이다...” 매일 매일 이런 세상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믿기 어렵고 믿을 수 없는 굉장이 많은 일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자기 신앙이 없으면 다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말씀을 따라가고, 잘못된 사람을 따라가고, 세상의 가르침과 소리를 따라가고, 세상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면, 사도 요한의 참된 공동체를 떠난 이단자들처럼, 우리도 영적인 생명을 위협받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상태가 완전히 세상으로 넘어가면, 그들의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사랑하고 올바른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늘 말씀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목사라서 여러분 교회 많이 나오시라고 직업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을 영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약한 사람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종말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만 잘 하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심히 사시는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시간을 정하시고, 미리 준비하시고, 있어야 할 곳에 있으시고... 목사나 교회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죄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6:4~6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에서 한번 빛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다’고 할 때의 한번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는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할 때의 맛보았다는 말씀도 단순히 살짝 맛을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는 히 2:9 말씀처럼 온전히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 말씀은 그렇게 분명히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을 저버리고 배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죄는 한마디로 ‘배교의 죄’를 말합니다.
비교해보면, 앞서 요한일서 말씀이 잘 모르거나 유혹을 받고 스스로 약해져서 이단과 잘못된 신앙과 세상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이 깊어지고 굳어지는 것을 말씀했다면, 이 히브리서 말씀은 자신의 의지로 명백히 배교하는 일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당시는 신앙을 저버리도록 하는 세상의 강한 압박과 박해와 불이익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상황은 어떨까요? 배교가 우리 신앙의 문제가 될 위험이 있을까요? 네, 충분히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는 유혹의 시대에서 배교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교의 위험과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유혹은 영적으로 약한 자들과 어린 자들을 다루는 사탄의 방법인데, 그 방법이 충분히 성과를 거두고 또 여건이 조성되면, 이제 사탄은 더 강한 방법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는 강한 위협과 압박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도 일어나고 교회적으로도 일어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가 그런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안타깝게도 일부 교회와 신자들을 제외하고, 신사참배에 많이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런 불행한 역사가 역사로 그치지 않고 오늘날에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을 하도록 늘 많은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중요한 결정적인 일을 신자나 교회가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교회가 지지하면 될까요?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을 교회가 지지하면 될까요?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했고,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의 위협과 압박을 잘 알아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을 저버리는 배교를 결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잘 되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개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을 저버리는 배교는 우리가 단순히 약하고 두려워서 일시적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돌아왔지만, 가룟 유다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히브리서 말씀이 그렇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죄를 경고한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다 이 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 마가복음 말씀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네, 그래서 이 죄는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한 죄가 됩니다.
그러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그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귀신 축출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내었다고 말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많은 백성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방향을 정했습니다. 그의 능력이 선한 능력인지 아닌지, 귀신의 능력인지 아닌지... 조사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백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그런 개혁적인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만 적절한 처리 방법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이고 율법사였지만 놀라운 일을 행하는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을 정치종교적인 이해 관계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말했기 때문에, 그것은 성령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가 될까요?
네, 그것은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고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리와 멀어지면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판단이 진리와 멀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소용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일으켜세우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랑과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고, 그 반대편인 거짓과 죄로 계속 나아가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결국 거두어지고 맙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여호와의 영광은 부패한 성전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처음에는 진리를 외면하고, 그 다음에는 진리를 싫어하고, 마침내는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 서기관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이와 같은 두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마음과 생각은 예수를 믿은 후 진리와 선과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양심을 속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아니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버리고 내 이익을 쫓고... 그러면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을 훼방하고 근심하시게 하고 모독하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깨어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일서의 사망에 이르는 죄, 히브리서의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죄, 복음서의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영원한 죄... 이 3개의 죄는 다 동일한 죄입니다. 모두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개의 죄악은 모두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대적하고... 그런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굳어지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최고의 죄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는 부드러운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짓과 어리석음과 교만과 미련함으로 묵은 땅이 되지 않도록 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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