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15
2023.06.11.
요한일서 2개의 본론과 2개의 결론이 끝났습니다. 이제 요한일서는 부록과 같은 2개의 에필로그를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2개의 에필로그 구조는 간단합니다. 먼저 ‘무엇을 안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하라’라는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 에필로그 14~15절은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16~17절은 ‘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에필로그 18~20절은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21절은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요한일서는 마지막에 부록과 같은 2개의 권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 말씀하는 첫 번째 에필로그... 그 중에서도 14~15절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뜻대로 구하면 들으시고, 구하면 또한 얻은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평소 잘 아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대해 큰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2가지 확신입니다.
뜻대로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확신, 그리고 기도하면 이미 얻었다는 확신... 그래서 한 마디로 이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큰 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기도 응답에 가장 관심이 많죠. 우리는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기도 응답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 응답이라는 문제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네,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기도 응답에 대한 신앙 서적도 많고 가르침도 많고 설교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조지 뮬러의 오만 번의 기도 응답을 말합니다. 어떤 분은 야베스의 기도를 말합니다. 어떤 분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말하고, 어떤 분은 긍정의 힘을 말하고, 어떤 분은 강권 기도를 말하고, 능력 기도를 말하고, 금식 기도를 말하고, 어떤 분은 심지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모든 기도는 기도 응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도에 대한 많은 가르침 중에는 성경적인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도 응답은 왜 어려울까요?... 네, 아주 쉬운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일들이 대체로 어려운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일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죠. 예를 들어 우리는 볼펜을 잃어버리거나 손수건을 잃어버린 문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른 볼펜 쓰면 되고, 없으면 하나 사도 되고...
그래서 보통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경제가 어려운데 사업이 잘 되고 가게가 잘 되게 해주세요, 아무개랑 사이가 좋지 못한데 사이가 좋게 해주세요, 세상이 악하고 가치관이 혼란스러운데, 우리 아이가 믿음 안에서 잘 자라게 해주세요, 불치의 병인데 병을 고쳐 주세요...’ 우리는 이런 어려운 일들을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데 일어나는 이런 어려운 일들이... 기도 한 번으로 간단히 해결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일들이 기도 한 번으로 쉽게 해결된다면, 교회는 사람들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응답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기도 제목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시기에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문제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이 현실 속에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재정과 노력이 필요하고 사람이 변화되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응답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환상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한 번에 해결하겠다... 기적적으로 해결하겠다... 이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기적은 기적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이 일상이 되고 상식이 되면, 우리 삶은 오히려 많은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든 구원이든 경제 생활이든... 한 번에 손쉽게 얻겠다는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도 소위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로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응답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기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특권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만능은 아닙니다. 아시는 것처럼, 옛날 시골에 가면 만병통치약을 파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이 약만 먹으면, 두통도 낫고 치통도 낫고 배 아픈 것도 낫고 혈액 순환도 잘 되고 피부도 좋아지고... 네, 그런 약이 지금도 있을까요?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일상과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리 기도가 좋은 것이라도, 기도가 결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의 수단과 방법을 주셨습니다. 기도는 그중 하나의 수단과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는 더 나은 수단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인간적인 자기 생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기도의 방향도 삶의 방향도 찾기 어렵습니다.
또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감동하시는 우리의 건전한 생각과 지혜는 급하고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더 나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우리의 손과 발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의 병거가 있는 위기의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갈라지게 하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홍해는 그들 앞에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에 들어설 때, 요단강 물은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생각도 하고 용기도 내고 행동도 하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절대시하거나 기도 일변도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여러 수단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여러 수단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기도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많은 체험과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와 신실한 신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도에 비해서, 다른 하나님의 수단들은 많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이 약하고 신학이 약하고 사랑이 약하고 신앙의 실천이 약하고 성숙한 관계가 약하고 성숙한 생활이 약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잘하고 이웃과 사회에 잘하는 것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려고만 했지,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는 일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자들 개인도 신앙생활은 뜨거운데, 자신의 일과 가정과 생활에 신자답지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기도에 많이 기울어진 불균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서 안에 기독교 이전부터 신에게 빌고 소원을 염원하는 샤마니즘이 많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이 내용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인데, 그러나 기도를 절대시하지 말고, 또 기도를 많이 하는 만큼 다른 영적인 수단과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령 기도를 조금 덜 하더라도, 우리 신앙이 전체적으로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지식과 실천에 균형 있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과 응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해서 병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죠. 기도해서 악한 영이 나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평소 악한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생겨서 기도를 하고 기도 응답을 받고 해결하는 것을 중요시하기보다는, 그런 문제나 어려움이 많이 생기지 않는 건강하고 성숙한 생활을 하는 것을 더 중요시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기도 응답이라는 주제를 놓고, 먼저 2가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기도 응답에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기, 둘째는 기도만을 하나님의 역사와 응답의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기.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2가지 내용만으로도 기도 응답에 있어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기도 응답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원리가 무엇인가... 네, 사도 요한은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씀합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잘 받으려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잘 살게 해주세요,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올바른 기도일까요? 내가 잘 사는 것이나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죠.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내가 잘 살거나 혹은 못 살거나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 되어야 할 이유가 있으면,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야베스의 기도는 단순히 잘 살고 잘 되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야베스에 대해 성경이 많은 말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유다의 자손으로서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어려운 삶 속에 그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야베스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겐 족속 이방인으로서 유다 자손에 편입된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는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경을 넓히고 그 땅에 정착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갈렙과 같이 안전한 곳에 살지 않고 아직 정복되지 못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확장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죠. 더구나 만약 그가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 출신이라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나아가는 것은 더욱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과 영달을 바란 그런 기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을 추구한 귀한 기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제 막 왕이 된 솔로몬은 왕으로서 올바른 재판을 하기 위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그 기도가 얼마나 흡족하셨던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함께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이 주신 삶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 내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런 목적과 이유라면, 그게 돈이라면 돈도 주시고, 그게 능력이라면 능력도 주시고, 그게 성공이라면 성공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과 이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돈이나 능력이나 성공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하거나 스스로 교만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할 때 무조건 내 바램을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생각하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고민과 생각이 깊을수록, 좋은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도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나의 기도, 요나의 기도, 시편의 기도들... 이와 같은 성경의 기도들은 여러분의 구체적인 문제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16절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라고 고백하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실하신 분이시라면, 그 논리적 결과는 무엇일까요? 네, 그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반드시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의 구원과 영적인 변화를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물론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의미가 다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순수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끝내 거절하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응답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응답 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최종적인 선택과 결정대로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렸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지...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죠.
저의 집 우주가 어릴 때, 제가 우주에게 기도를 해보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셔” 그런데 우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던데요... 그래서 이제 기도 안 해요.” 그래서 뭘 기도했냐고 하니까, 게임 많이 하는 거... 뭐 그런 것들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우주에게 제가 오늘 설교 같은 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주가 나중에 커서 하나님을 잘 알게 되면, 기도의 중요성도 알고 기도 응답도 확신하고 기도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 응답에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안에서 드리는 모든 올바른 기도는 다 응답 됩니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은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된 기도는 다 응답됩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잘 아는 사도들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다 그 기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여기서 야고보의 이 말씀은 기도의 결과를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하라 믿음 안에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확신하는 분들의 기도는 편안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가까움이 기도 가운데 느껴집니다. 미사여구나, 중언부언이나, 불필요한 힘이나,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불필요한 설득이나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 생각이나... 그런 것이 기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과 사랑과 평안 가운데 아름답게 기도를 드립니다.
그분들이 그런 기도를 어떻게 드릴 수 있을까요? 네,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기도에 대한 확신과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성 기도도 좋고, 철야 기도도 좋고, 금식 기도도 좋고, 나무뿌리를 뽑는 기도도 좋지만, 그러나 기도의 가장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 응답의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런 확신의 신앙을 가졌기에 오늘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 같이 이 말씀을 믿음으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확신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