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예언, 묵시
계1:1~3
2021.05.14
오늘부터 요한계시록 말씀을 금요기도회에서 나누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웬만한 신자라면 꼭 한번 알고 싶은 말씀이죠.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알아서 본인의 교회 성도들에게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조금 어려운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그 안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포괄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의 예언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요한계시록만 보아서는 잘 알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정감록이라는 예언서가 있죠. 아직도 어느 지역에 가면 평생 정감록만 읽는 분들이 있어서, 김감록 박감록 최감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어떤 분들은 요한계시록만 평생 수백 번을 읽었다는 사람이 많고 일례로 길선주 목사 같은 분은 평생 만 번 이상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알기 어려운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알려면, 말씀드린 것처럼, 신약은 물론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특히 구약의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라는 저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 저자 만큼의 성경 이해와 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가져야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간 우리 교회 안에 요한계시록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세미나나 말씀 집회 같은 것이 있긴 했는데, 그 가르침과 해석이 그리 썩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이고 어떤 특성을 가졌고 전체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고 또 상징은 무엇이고 당시 시대 배경은 어떤지... 그런 기본적인 내용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건너뛰고 어떤 특정 신학과 해석에 입각하여 개별 구절을 바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자의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해석이 난무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불건전한 종말론이 많이 생기고 종말의 시간표가 생기고, 또 이단들도 자기들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순진한 신자들을 미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좋은 주석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을 오랜 시간 전문적으로 연구한 주석들이죠. 그런 좋은 성경주석을 쓰는 학자들은 대체로 신실한 좋은 신앙을 가진 분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최근엔 많은 목사님들이 그런 주석의 도움을 받아 요한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여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최근 한국교회 안에는 점점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이해가 높아지고 있슶니다. 예전과 같은 무분별한 해석은 사라지고 점점 건전한 종말론이 정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준비하면서, 좋은 주석서를 참고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신학교와 학자들에게 추선을 받은 그런 좋은 주석서를 참고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설교 중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해서는 너무 의심하지 마시고 편안히 들으셔도 되겠습니다. 저의 생각이나 해석이 아니라, 그런 검증된 해석을 바탕으로 말씀 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디더라도 조금씩 이렇게 말씀을 보다 보면 그리 멀리 않아 요한계시록 전체를 다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금요기도회의 말씀과 기도에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빕니다.
그럼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1:1~3절은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의 서론 중의 서론입니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사실, 그리고 이 계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인데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자신에게 보이셨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이 계시를 신실하게 다 증언한다는 것,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되다는 것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때가 가깝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계시의 주체와 전달자, 그리고 계시의 목적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서론은 비록 3절 밖에 되지 않지만, 들여다보면 사실 그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이 본문 안에 있는 여러 내용을 다루지 않고, 여기에 나타난 요한계시록의 목적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헬라어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포칼립시스 이에수 크리스투...” 그래서 여기서 이 ‘계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이 ‘아포칼립시스’는 ‘묵시’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와 묵시가 헬라어로는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어로는 같지만, 실제로 사용할 때는 계시와 묵시를 일반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구분을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1:1절은 요한계시록을 ‘계시’ 또는 ‘묵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요한계시록을 또 ‘예언의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말씀인가... 네 이 말씀은 계시이자 묵시이자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계시와 묵시와 예언에 대해, 이 세 가지를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본적으로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어떤 목적을 가진 책인지를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뭐고 묵시가 뭐고 또 예언은 뭔가.... 그런데 이 내용은 사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의 기본적인 뜻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묵시는 그 드러내시는 뜻 중에서 종말에 관한 좀 특별한 뜻을 말합니다. 한편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이 받아서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이란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계시와 묵시와 예언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이 세 개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드러내신 것은 모두 계시인데 그 중에서 좀 일반적인 계시는 예언이라 하고, 종말론적인 좀 특별한 계시는 묵시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시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어떤 것은 예언이고 어떤 것은 묵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예언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아모스를 필두로 호세아,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이죠. 그 예언자들은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말라기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라기 이후 이런 예언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끊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예언이 소멸되고 없어진 자리에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났습니다. 침례요한이 등장하기 전에 그것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이 바로 묵시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예언이 사라지고 묵시가 등장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영적 상황이 굉장히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심각한 신앙의 변절과 타락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언은 힘을 잃고 그 대신 묵시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묵시 전통은 대략 BC250년에서 AD100년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도 바울도 그 시기에 들어있고, 그래서 예수님도 그와 같은 묵시 전통의 분위기 아래에서 하나님의 나라, 종말, 지옥 같은 묵시적인 말씀을 많이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묵시는 예언이 굉장히 강화된 것, 즉 예언이 업그레이드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일반적인 약으로 병이 안 나을 때 더 센 약을 처방하지 않습니까? 묵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는 그 말씀이 좀 무섭고 강력합니다. 최후와 마지막을 보여주고 하늘의 관점을 강조하고 수많은 상징과 비유가 등장하고 또 아주 극적인 내용들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바로 그런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네, 오늘은 요한계시록이 묵시라는 사실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